“얘야, 근데, 아주 이상한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큰언니집에서 내 옆에 앉으셨던 어머니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하시는 말이다.
“왜?”
“창피해서, 너에게만 말하려고.., 최근에 신문사에서 전화왔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인터뷰를 하자는 거야.”
응, 내 볼이 씰룩거렸다. 무슨 일인지 대강 머리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한월수씨죠? 자식을 11명이나 낳으셨다면서요? 한번만 만나주세요.”
여자기자의 말에,
“아니, 그건 어떻게 아셨슈? 그렇잖아도 창피한 일인데. 아이구 안 만나요.”
“재밌잖아요. 만나주세요.”
대강 그런 이야기였다.
신문사가 연말 기사거리를 놓고, 어떻게 알았는지, 자식많이 낳은 엄마 이야기를
화제에 올려보았나 보았다.
당겨올라간 내 볼이 제자리를 찾지 않는다.
재미로 한번 다루겠다?
엄마는 딸만 10명을 낳으셨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는 우리의 큰어머니(아들 하나를 낳고 돌아가신)의 소산이고,
손이 귀한 집에 두번째 부인으로 들어오셔서 딸을 그렇게나 많이 낳으신 것이다.
다섯째 딸을 낳고 여섯번째 낳은 아이는 사내아이였다고 한다.
그 금쪽같은 사내아이를 아주 어릴때 잃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들어누우셨던 이야기를 들은 적있다.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는데, 남편이고 다른 자식이고 하나도 눈에 안들어오셨다고 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계셨던 아버지가,
실망한 나머지 밖에서 떠돌다가 병을 얻으셨다.
초죽음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보니,
엄마가 다시 살 용기가 나셨다고.
이미 세상을 떠난 자식,,,,, 남편을 잃게 되면 그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아채셨던 건가?
엄마는 다시 남편을 살려내느라, 온갖 정성을 들이고…
그 당시의 엄마를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쨋든 그러고도 계속 딸을 생산,
내가 일곱째로 태어났다.
엄마 친구들은 나를 딸고만이라고 불렀다.
내 멀쩡한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린 이름이다.
엄마도 그렇지만, 나도 머리가 크면서부터 가족상황을 밝히길 꺼려했었다.
자식이 많은 집은 “무식”한 대열에 들뿐 아니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비웃음”의 대상에 든다고 생각했다.
10명의 자식들을 낳으려면, 몇십년간을 배만 불렀겠네 하면서
엄마를 “동물”보듯 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
그래서, 웬간해서는 마치 집안의 큰 비밀거리인양, 입을 앙다물었던 것 같다.
엄마는 지금도 그러신다.
아프다가도
“내가 이 자식들을 낳아놓고, 눈을 감는다면 어쩔까”싶어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시곤 하셨다는.
“내 죄라면, 자식 많이 낳은 죄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자매들이 나이가 들어놓으니 “가족의 부끄럼”이
“가족의 자랑”으로 둔갑하는 경험도 하게 되고,
마음에 부딪침이 있는 이들에게는 즐거이 “딸 열”의 비밀을 들려주게도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직도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모양이시다.
교사봉급으로 그많은 자식들 키우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엄마는 내 나이때, 시골 이층에서 <다방>도 경영하셨고,
<일수>로 돈을 얻어 학비를 대곤 하셨다.
엄마의 가장 큰 결정은 아마도 우리 가족의 <이민>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님이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큰딸이 있는 캐나다행을 감행하셨다.
결혼안한 5명의 딸을 데리고, 집을 팔고 남은 돈 약간을 가지고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위로 네명의 딸을 결혼시키면서 딸을 여의는 것이 쉽지 않으셨나 보나.
한국사회가 딸 하나 해치우는데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어쨋든 캐나다에 와서도 엄마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뿌리가 없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자식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다니던 신문사에서 직원들을 위해 매일 점심을 지어 대령하는 직업도 감당했으며,
딸의 대학학비를 위해, 집을 떠나서 겨울 서너달 동안,
합숙근무를 하는 한인상사 직원들의 밥을 지어주는 직업도 가졌었다.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식모>격인 직업이었던 듯싶다.
어떻게 엄마를 그런 산업전선에 내몰았는지, 지금은 이해도 안되지만,
당신의 힘이 다하기까지 자식들을 위해 몸을 바치신 분임에 분명하다.
74살인 엄마의 요즈음은 참으로 편안하다.
한인할머니들이 십여분 계신 낮고 아름답게 지어진
노인아파트에서 생활하신다.
자식들 사각모 쓰고 졸업한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이불을 보송보송하게 개어놓았다가 우리들이 하루라도 들리면,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놓으신다.
나는 그동안 자식들이 엄마에게 보통이상으로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자식 누구나 엄마의 고마움을 알고, 때가 되면 성의표시도 하고 말이다.
근데, 내가 자식이 있어보니,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내 딸자랑으로 넘어가자면,
우리 애들은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이며
엄마가 웃는 표정을 안하면 “엄마 괜찮아?”를 수백번 물어본다.
맛없는 반찬을 해줘도 엄마의 음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영어를 못해 제 또래의 친구엄마와 같지않음을 잘 알면서도,
<한국말>잘하는 엄마를 떠받들어준다.
제 친구가 와도 맵지않은 이곳 음식을 제까닭 못만들어내고, 수제비를 먹으라고
상에 올려도, <우리 엄마 최고>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국산이라고 칭찬에 인색에 나를 돌아본다.
엄마는 간, 쓸개까지 자식들을 위해 빼주셨는데,
가끔 “성의”를 표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 우리 자식들이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엄마가 뭐 장한 어머님상같은 거라도 받으면, 엄마에게 좀 보상이 될텐데.. 안그래?” 했더니,
언니 말이
“엄마에게 그런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었어. 근데, 그걸 엄마가 극구 막으셨었지.
자식 많은 것도 창피한데, 그때문에 상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말이다.”한다.
엄마가 한글을 읽지 못했다는 것도 언니를 통해 알게됐다. 캐나다에 와서 한글공부를 해서 이제는 잘 읽으시고 잘 쓰신다.
나는 일년에 한번도 읽지 못하는 성경을 엄마는 작년에만 세번을 독파하셨대나.
자식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조금씩 활로를 찾아나가는 것이 엄마의 기도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 엄마의 묘지 자리를 샀다.
엄마가 좋아하는 나라 캐나다, 언덕위에 한인들의 묘가 모여있는 곳,
우리 자식들은 엄마의 묘비명을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
평생토록 사랑의 샘물을 길어올리신 당신
우리 가슴에 빛으로 남으소서>
한월수(Wol-Soo Han)
(1928년 4월 28일-)
그러곤 <존경과 감사를 바칩니다>라는 문구밑에
자식들 가족이름을 조그맣게 넣을까한다. 숫자가 많으니 아주 조그맣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큰언니집에서 내 옆에 앉으셨던 어머니가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하시는 말이다.
“왜?”
“창피해서, 너에게만 말하려고.., 최근에 신문사에서 전화왔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인터뷰를 하자는 거야.”
응, 내 볼이 씰룩거렸다. 무슨 일인지 대강 머리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한월수씨죠? 자식을 11명이나 낳으셨다면서요? 한번만 만나주세요.”
여자기자의 말에,
“아니, 그건 어떻게 아셨슈? 그렇잖아도 창피한 일인데. 아이구 안 만나요.”
“재밌잖아요. 만나주세요.”
대강 그런 이야기였다.
신문사가 연말 기사거리를 놓고, 어떻게 알았는지, 자식많이 낳은 엄마 이야기를
화제에 올려보았나 보았다.
당겨올라간 내 볼이 제자리를 찾지 않는다.
재미로 한번 다루겠다?
엄마는 딸만 10명을 낳으셨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는 우리의 큰어머니(아들 하나를 낳고 돌아가신)의 소산이고,
손이 귀한 집에 두번째 부인으로 들어오셔서 딸을 그렇게나 많이 낳으신 것이다.
다섯째 딸을 낳고 여섯번째 낳은 아이는 사내아이였다고 한다.
그 금쪽같은 사내아이를 아주 어릴때 잃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들어누우셨던 이야기를 들은 적있다.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는데, 남편이고 다른 자식이고 하나도 눈에 안들어오셨다고 했다.
당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계셨던 아버지가,
실망한 나머지 밖에서 떠돌다가 병을 얻으셨다.
초죽음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보니,
엄마가 다시 살 용기가 나셨다고.
이미 세상을 떠난 자식,,,,, 남편을 잃게 되면 그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아채셨던 건가?
엄마는 다시 남편을 살려내느라, 온갖 정성을 들이고…
그 당시의 엄마를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쨋든 그러고도 계속 딸을 생산,
내가 일곱째로 태어났다.
엄마 친구들은 나를 딸고만이라고 불렀다.
내 멀쩡한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린 이름이다.
엄마도 그렇지만, 나도 머리가 크면서부터 가족상황을 밝히길 꺼려했었다.
자식이 많은 집은 “무식”한 대열에 들뿐 아니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비웃음”의 대상에 든다고 생각했다.
10명의 자식들을 낳으려면, 몇십년간을 배만 불렀겠네 하면서
엄마를 “동물”보듯 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
그래서, 웬간해서는 마치 집안의 큰 비밀거리인양, 입을 앙다물었던 것 같다.
엄마는 지금도 그러신다.
아프다가도
“내가 이 자식들을 낳아놓고, 눈을 감는다면 어쩔까”싶어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시곤 하셨다는.
“내 죄라면, 자식 많이 낳은 죄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자매들이 나이가 들어놓으니 “가족의 부끄럼”이
“가족의 자랑”으로 둔갑하는 경험도 하게 되고,
마음에 부딪침이 있는 이들에게는 즐거이 “딸 열”의 비밀을 들려주게도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직도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모양이시다.
교사봉급으로 그많은 자식들 키우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엄마는 내 나이때, 시골 이층에서 <다방>도 경영하셨고,
<일수>로 돈을 얻어 학비를 대곤 하셨다.
엄마의 가장 큰 결정은 아마도 우리 가족의 <이민>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님이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큰딸이 있는 캐나다행을 감행하셨다.
결혼안한 5명의 딸을 데리고, 집을 팔고 남은 돈 약간을 가지고 말이다.
잘은 모르지만, 위로 네명의 딸을 결혼시키면서 딸을 여의는 것이 쉽지 않으셨나 보나.
한국사회가 딸 하나 해치우는데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어쨋든 캐나다에 와서도 엄마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뿌리가 없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자식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다니던 신문사에서 직원들을 위해 매일 점심을 지어 대령하는 직업도 감당했으며,
딸의 대학학비를 위해, 집을 떠나서 겨울 서너달 동안,
합숙근무를 하는 한인상사 직원들의 밥을 지어주는 직업도 가졌었다.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식모>격인 직업이었던 듯싶다.
어떻게 엄마를 그런 산업전선에 내몰았는지, 지금은 이해도 안되지만,
당신의 힘이 다하기까지 자식들을 위해 몸을 바치신 분임에 분명하다.
74살인 엄마의 요즈음은 참으로 편안하다.
한인할머니들이 십여분 계신 낮고 아름답게 지어진
노인아파트에서 생활하신다.
자식들 사각모 쓰고 졸업한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이불을 보송보송하게 개어놓았다가 우리들이 하루라도 들리면,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놓으신다.
나는 그동안 자식들이 엄마에게 보통이상으로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자식 누구나 엄마의 고마움을 알고, 때가 되면 성의표시도 하고 말이다.
근데, 내가 자식이 있어보니,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내 딸자랑으로 넘어가자면,
우리 애들은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이며
엄마가 웃는 표정을 안하면 “엄마 괜찮아?”를 수백번 물어본다.
맛없는 반찬을 해줘도 엄마의 음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영어를 못해 제 또래의 친구엄마와 같지않음을 잘 알면서도,
<한국말>잘하는 엄마를 떠받들어준다.
제 친구가 와도 맵지않은 이곳 음식을 제까닭 못만들어내고, 수제비를 먹으라고
상에 올려도, <우리 엄마 최고>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국산이라고 칭찬에 인색에 나를 돌아본다.
엄마는 간, 쓸개까지 자식들을 위해 빼주셨는데,
가끔 “성의”를 표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 우리 자식들이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엄마가 뭐 장한 어머님상같은 거라도 받으면, 엄마에게 좀 보상이 될텐데.. 안그래?” 했더니,
언니 말이
“엄마에게 그런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었어. 근데, 그걸 엄마가 극구 막으셨었지.
자식 많은 것도 창피한데, 그때문에 상을 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말이다.”한다.
엄마가 한글을 읽지 못했다는 것도 언니를 통해 알게됐다. 캐나다에 와서 한글공부를 해서 이제는 잘 읽으시고 잘 쓰신다.
나는 일년에 한번도 읽지 못하는 성경을 엄마는 작년에만 세번을 독파하셨대나.
자식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조금씩 활로를 찾아나가는 것이 엄마의 기도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 엄마의 묘지 자리를 샀다.
엄마가 좋아하는 나라 캐나다, 언덕위에 한인들의 묘가 모여있는 곳,
우리 자식들은 엄마의 묘비명을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
평생토록 사랑의 샘물을 길어올리신 당신
우리 가슴에 빛으로 남으소서>
한월수(Wol-Soo Han)
(1928년 4월 28일-)
그러곤 <존경과 감사를 바칩니다>라는 문구밑에
자식들 가족이름을 조그맣게 넣을까한다. 숫자가 많으니 아주 조그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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