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읽고 여러분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시한번 읽은 박완서씨의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소설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소설이 괜찮으니 읽어보시오> 라든가 <이러저러한 문장이 참말로 좋았다>는 그런 감탄적인 내용이 아니라, 소설을 빙자해서,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짚어보고 싶었다.
벌써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감이 잡혔을 수도 있다.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이라니, 네가 뭔데, 너는 <한국밖에 사는 한국사람>으로 교묘하게 피해보겠단 말이지?하면서.
그렇다. 사실 비판이 하고 싶다. 한국사회까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것같은 느낌이 들때가 많았다.
사람들의 일그러짐, 어떤 순간, 어떤 상황도 찬 바윗돌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 입이 돌아간 사람처럼, 비틀린 사람들을 보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왔다.
안 읽은 사람을 위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우선 주인공(화자)은 <심영빈> 의사로, 모범생으로 자란 의학박사이다. 단지 그는 즐거이 모범생이 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대와 천성적으로 악하지 못한 성격으로 그렇게 되어진 사람이다.
그런 그가 초등학교 동창인 <묘하게> 이쁜 현금이란 여자를 40대 중반에 만나서 외도를 하게 된다. 껍데기만 집안에 걸쳐두고, 여자에게서 안식을 찾는다.
물론 이것 자체를 나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쉼이 없다. 일에 찌들고, 여자에게서 잠시 목을 축이나, 그건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다. 척박한 의료환경, 일반인에 비해 메스꺼운 VIP를 자처하는 환자와 환자가족들의 이야기,,가 심의사를 통해 이야기되어진다. 사회적인 성취를 이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피폐하기 이를데 없다.
두번째, <현금>이란 여자.
작가가 꽤 공을 들인 사람같다.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으며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 첫 결혼을 돈을 보고 하고, 남편과도 <즐기는> 것 이상을 나누지 않았던 도도한 여자. 이혼후 농사도 지어보려고 하고, 음식도 배워보고… 뭔가 창조적인 것을 찾는다. 그때 초등학교 동창 심영빈의사를 만나,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물론 현금은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여자를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다. 사회적인 굴레를 쓰지않았지만, 결국은 돈만 많은 <정신의 허영덩어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작가도 그렇게 그린 것일까? 설마, 사회의 제도속에서 고고한 <현금>을 어떤 이상형으로 그린 건 아닐까? 자꾸 염려가 된다.
세번째 영빈의 막내동생 <영묘>.
영빈의 엄마가 늦게 얻은 딸이다. 뇌물수수등의 오명을 쓰고 남편이 죽은후에 영빈의 엄마가 <부끄럼>처럼 얻은 딸. 그녀는 오빠 영빈의 사랑을 받는다. 영묘를 통해서는 재벌(졸부)들의 냄새나는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그 시댁의 일처리 방법. 병원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것에서부터, 온갖 병에 좋다는 약, 치성…. 그 안에서 영묘의 남편은 시댁식구의 함구명령아래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차츰차츰 소멸되어간다.
주요인물들외에도 심영빈 의사를 둘러싼 아내, 그의 형, 친구, 그리고 어머니, 현금의 집안 이야기들이 잘 교배되어 있다.
다른 사람눈에는 의사부인이며 전문직 여성으로 부러울 것 없을 것같은 중학교 교사인 심영빈의 처는 두 딸을 낳고, 혼자서 고민한다. 시어머니의 핀잔도 그렇지만, 말한마디 불평없는 남편에게서도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그녀는 아들을 임신하기 위해 남편의 친구가 주치의로 있는 불임치료소에서 두번의 낙태까지 하며 꾸준히 치료를 받아 세째를 임신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당신같은 도덕군자가 여자들을 얼마나 골탕먹이는지 알기나 해요?”……………….
어때야 한다는 말인가. 도덕군자도 안되고, 그렇다면 아들 못낳는 아내를 시도때도 없이 구박하는 제어머니같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인간도 될 수 없다.
정직하게 말해도 비극으로 끝나고(치킨 박), 아들이 필요없다고 말해도 결사적으로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내, 생명의 신비감이 없는 아들을 들여다 보는 의사.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그의 가정은 이렇게 허구속에 이뤄져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방을 처음 들어와본다는 묘사가 있다. 결핍을 모르는 아이들이 그속에 있다. 저이들만의 세계를 형성한.
사실 소설은 환자와 의사, 그리고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반응들을 축으로 하고 있다. 특별히 영묘의 남편이 죽을병에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불치병에 대한 작가의 울부짖음이 있는 것 같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알권리>를 줘야 한다는. 너무 단순해서 토론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당연함이 <쉬쉬>되고 <터부시> 된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다.
심영빈 의사도 그를 참아내지 못한다. 환자들이 모르게 가족끼리 그 비밀을 안고있는 것은 실상 <환자>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떤 <음모>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곤, 완치가능한 초기 암환자(치킨 박이라 불리는)에게 사실을 알리지만, 그 사실을 안 환자는 지레 <죽을병>으로 생각하고, 병원비를 들이느니, 부인과 자식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만다. 그 참담함….
기가막힌 것은 소설 말미에 있는 문학평론가의 <해설>편에는 치킨 박의 죽음을 빛나는 정신의 승리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재벌가에서 죽음을 둘러싸고 벌이는 눈에 안보이는 이전투구보다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먼저 죽는…
동의하지 못한다. 사회가, 사람이 얼마나 비뚤어졌으면 의사가 완치될 수 있다고 하는 데도 못믿고, 자살을 선택하는 그 환자나, 죽음으로서라도 재산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그 물질만능을 납득할 수 없다. 인명경시다. 사실, 이 책 전반에서 인간에 대한 소중함이 없다. 악다구니와 각자의 입장과, 관계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하는가.
영빈의 형으로 나오는 <성공한 재미교포>의 쉬우면서도 졸부(여동생의 시집)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런 기술적인 인물을 보여주긴 하지만, 아주 조금이다. 시집에서 휘둘림당한 영묘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오빠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새로운 세대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사회 밖으로 문제를 돌출시킨 그런 조그마한 것들을 빼놓고 본다면, 상식이 절대로 통하지 않고, 착하게도 나쁘게도 살아선 안되는 한국이란 사회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회가 정말 <한국사회>인가?
<소설이 괜찮으니 읽어보시오> 라든가 <이러저러한 문장이 참말로 좋았다>는 그런 감탄적인 내용이 아니라, 소설을 빙자해서,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짚어보고 싶었다.
벌써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감이 잡혔을 수도 있다.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이라니, 네가 뭔데, 너는 <한국밖에 사는 한국사람>으로 교묘하게 피해보겠단 말이지?하면서.
그렇다. 사실 비판이 하고 싶다. 한국사회까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것같은 느낌이 들때가 많았다.
사람들의 일그러짐, 어떤 순간, 어떤 상황도 찬 바윗돌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 입이 돌아간 사람처럼, 비틀린 사람들을 보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왔다.
안 읽은 사람을 위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우선 주인공(화자)은 <심영빈> 의사로, 모범생으로 자란 의학박사이다. 단지 그는 즐거이 모범생이 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기대와 천성적으로 악하지 못한 성격으로 그렇게 되어진 사람이다.
그런 그가 초등학교 동창인 <묘하게> 이쁜 현금이란 여자를 40대 중반에 만나서 외도를 하게 된다. 껍데기만 집안에 걸쳐두고, 여자에게서 안식을 찾는다.
물론 이것 자체를 나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쉼이 없다. 일에 찌들고, 여자에게서 잠시 목을 축이나, 그건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다. 척박한 의료환경, 일반인에 비해 메스꺼운 VIP를 자처하는 환자와 환자가족들의 이야기,,가 심의사를 통해 이야기되어진다. 사회적인 성취를 이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피폐하기 이를데 없다.
두번째, <현금>이란 여자.
작가가 꽤 공을 들인 사람같다.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으며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 첫 결혼을 돈을 보고 하고, 남편과도 <즐기는> 것 이상을 나누지 않았던 도도한 여자. 이혼후 농사도 지어보려고 하고, 음식도 배워보고… 뭔가 창조적인 것을 찾는다. 그때 초등학교 동창 심영빈의사를 만나,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물론 현금은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여자를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다. 사회적인 굴레를 쓰지않았지만, 결국은 돈만 많은 <정신의 허영덩어리>라고밖에 볼 수 없다. 작가도 그렇게 그린 것일까? 설마, 사회의 제도속에서 고고한 <현금>을 어떤 이상형으로 그린 건 아닐까? 자꾸 염려가 된다.
세번째 영빈의 막내동생 <영묘>.
영빈의 엄마가 늦게 얻은 딸이다. 뇌물수수등의 오명을 쓰고 남편이 죽은후에 영빈의 엄마가 <부끄럼>처럼 얻은 딸. 그녀는 오빠 영빈의 사랑을 받는다. 영묘를 통해서는 재벌(졸부)들의 냄새나는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그 시댁의 일처리 방법. 병원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것에서부터, 온갖 병에 좋다는 약, 치성…. 그 안에서 영묘의 남편은 시댁식구의 함구명령아래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차츰차츰 소멸되어간다.
주요인물들외에도 심영빈 의사를 둘러싼 아내, 그의 형, 친구, 그리고 어머니, 현금의 집안 이야기들이 잘 교배되어 있다.
다른 사람눈에는 의사부인이며 전문직 여성으로 부러울 것 없을 것같은 중학교 교사인 심영빈의 처는 두 딸을 낳고, 혼자서 고민한다. 시어머니의 핀잔도 그렇지만, 말한마디 불평없는 남편에게서도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그녀는 아들을 임신하기 위해 남편의 친구가 주치의로 있는 불임치료소에서 두번의 낙태까지 하며 꾸준히 치료를 받아 세째를 임신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당신같은 도덕군자가 여자들을 얼마나 골탕먹이는지 알기나 해요?”……………….
어때야 한다는 말인가. 도덕군자도 안되고, 그렇다면 아들 못낳는 아내를 시도때도 없이 구박하는 제어머니같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인간도 될 수 없다.
정직하게 말해도 비극으로 끝나고(치킨 박), 아들이 필요없다고 말해도 결사적으로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내, 생명의 신비감이 없는 아들을 들여다 보는 의사.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그의 가정은 이렇게 허구속에 이뤄져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방을 처음 들어와본다는 묘사가 있다. 결핍을 모르는 아이들이 그속에 있다. 저이들만의 세계를 형성한.
사실 소설은 환자와 의사, 그리고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반응들을 축으로 하고 있다. 특별히 영묘의 남편이 죽을병에 걸린 것부터 시작해서 불치병에 대한 작가의 울부짖음이 있는 것 같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알권리>를 줘야 한다는. 너무 단순해서 토론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당연함이 <쉬쉬>되고 <터부시> 된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다.
심영빈 의사도 그를 참아내지 못한다. 환자들이 모르게 가족끼리 그 비밀을 안고있는 것은 실상 <환자>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떤 <음모>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곤, 완치가능한 초기 암환자(치킨 박이라 불리는)에게 사실을 알리지만, 그 사실을 안 환자는 지레 <죽을병>으로 생각하고, 병원비를 들이느니, 부인과 자식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만다. 그 참담함….
기가막힌 것은 소설 말미에 있는 문학평론가의 <해설>편에는 치킨 박의 죽음을 빛나는 정신의 승리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재벌가에서 죽음을 둘러싸고 벌이는 눈에 안보이는 이전투구보다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먼저 죽는…
동의하지 못한다. 사회가, 사람이 얼마나 비뚤어졌으면 의사가 완치될 수 있다고 하는 데도 못믿고, 자살을 선택하는 그 환자나, 죽음으로서라도 재산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그 물질만능을 납득할 수 없다. 인명경시다. 사실, 이 책 전반에서 인간에 대한 소중함이 없다. 악다구니와 각자의 입장과, 관계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하는가.
영빈의 형으로 나오는 <성공한 재미교포>의 쉬우면서도 졸부(여동생의 시집)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그런 기술적인 인물을 보여주긴 하지만, 아주 조금이다. 시집에서 휘둘림당한 영묘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오빠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새로운 세대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사회 밖으로 문제를 돌출시킨 그런 조그마한 것들을 빼놓고 본다면, 상식이 절대로 통하지 않고, 착하게도 나쁘게도 살아선 안되는 한국이란 사회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회가 정말 <한국사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