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부족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변명이야 수두룩하다.
또 잘하는 것을 나열하는 것만 해도 지면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런가?
문제는 할 수 있는 걸 피해가려는 데 있진 않은가?
요즘 주체성이 흔들린다.
내 흔들림과는 관계없이, 가정은 견고해지는 것 같다.
자, 이제 현실을 짚어보자.
매일 저녁이면,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방검사를 하는 시간이다.
“이 옷은 누구거지?”
“이 가방은 어디에 둬야 하는 거야?”
“이 책은 소속이 어디니?”
아이들과 언니가 바쁘다.
건성으로 듣는 아이들, 바로세워가며 일일이 하나씩 지적해주고 챙겨준다.
입었던 옷중에 깨끗한 옷은 개서 바스켓에 넣고,
아무데다 던져놓았던 양말들이 빨래통으로 들어간다.
집안 대청소를 끝내고, 언니가 정한 규율이다.
물건갈데를 먼저 만들어놓더니, 그대로 해야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이 다 크도록 하지 못했던 일을 해주고 있다.
나는 약간 비켜선 자세로,
빨랑빨랑 안움직이는 아이들만, 한두번씩 다잡아주면 된다.
하참,,,,
그래서 나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는 왜 못했을까?
아이들을 무진장 신나게 놀게하기만 했을뿐,
치우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가끔 언성을 높여서 치우게는 하지만, 그건 가끔가다 있는 행사일뿐..
언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일이 점검한다.
처음에 힘들어하던 아이들도 이제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직도 스스로 몸에 밴 습관이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할테지만.
언니가 지치지 않고 해낼까 모르겠다.
아니면, 언제부터는 내가 인계를 받아 하는 것이, 도리인지도 모르고..
남편에게 한마디 듣는다.
잘못된 동생을 둬서 언니가 뭔 고생이냐고…
요즘은 그 고된 노동때문에 그야말로 언니의 입주위가 부르트기까지 했다.
면목이 없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저 먼 과거로 흘러간다.
나는 어려서(초등5학년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유학왔었다. 언니들 밑에서 공부하는데, 언니들이 나에게 “시키는”것이 그렇게 하기 싫었었다.
“청소해라, 빨래해라, 닦아라” 주로 그 3가지 였던 것 같다.
어린 중학교 시절, 겨울에 밖에서 빨래를 할라치면, 눈물부터 솟아오르곤 했었다.
그렇다고, 반항하는 성격도 못되서, 죽을 상을 하면서 해치웠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영향인지 모르겠다. 누구에게(그것이 가족이라고 해도) 무엇을 시키는 것이 싫다. 내가 해버리던지, 알아서 할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알아서 하겠는가? 주로 내가 하게 된다.
스스로 하기를 싫어했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언니가 혀를 차는 것이지만, <살림>보다는 딴데 마음이 더 가있다. 속속들이 정리정돈하는 습관이 배어있지 못하다. 나의 필요에 의해 하지 않고, 항상 누군가 시킴을 당해서 했던 것이 이렇게 된것인가?
요즘, 언니를 보면서 많이 반성하게 된다.
어수선한 자유에서, 규율이 있는 반듯한 집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가 위대해 보인다.
내 흔들림은 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게다.
언니가 이제는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창고속까지 들먹인다.
갈수록 쌓이는 쓰레기를 치우자는 말이다.
살면서 해야하는일, 그러나 막상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해야될 때가 온 것 같다.
된통 임자를 만났다.
올 여름엔 쓰레기 치우기와 남은 집안정리로 바빠질 것 같다.
게으름으로 무장됐던 <하릴없는 세월>은 먼곳으로 흘러보내야 한다.
진짜 살림꾼처럼 살아내는 날, 나의 흔들림도 진동을 멈추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변명이야 수두룩하다.
또 잘하는 것을 나열하는 것만 해도 지면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런가?
문제는 할 수 있는 걸 피해가려는 데 있진 않은가?
요즘 주체성이 흔들린다.
내 흔들림과는 관계없이, 가정은 견고해지는 것 같다.
자, 이제 현실을 짚어보자.
매일 저녁이면,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방검사를 하는 시간이다.
“이 옷은 누구거지?”
“이 가방은 어디에 둬야 하는 거야?”
“이 책은 소속이 어디니?”
아이들과 언니가 바쁘다.
건성으로 듣는 아이들, 바로세워가며 일일이 하나씩 지적해주고 챙겨준다.
입었던 옷중에 깨끗한 옷은 개서 바스켓에 넣고,
아무데다 던져놓았던 양말들이 빨래통으로 들어간다.
집안 대청소를 끝내고, 언니가 정한 규율이다.
물건갈데를 먼저 만들어놓더니, 그대로 해야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이 다 크도록 하지 못했던 일을 해주고 있다.
나는 약간 비켜선 자세로,
빨랑빨랑 안움직이는 아이들만, 한두번씩 다잡아주면 된다.
하참,,,,
그래서 나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는 왜 못했을까?
아이들을 무진장 신나게 놀게하기만 했을뿐,
치우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가끔 언성을 높여서 치우게는 하지만, 그건 가끔가다 있는 행사일뿐..
언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일이 점검한다.
처음에 힘들어하던 아이들도 이제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직도 스스로 몸에 밴 습관이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할테지만.
언니가 지치지 않고 해낼까 모르겠다.
아니면, 언제부터는 내가 인계를 받아 하는 것이, 도리인지도 모르고..
남편에게 한마디 듣는다.
잘못된 동생을 둬서 언니가 뭔 고생이냐고…
요즘은 그 고된 노동때문에 그야말로 언니의 입주위가 부르트기까지 했다.
면목이 없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저 먼 과거로 흘러간다.
나는 어려서(초등5학년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유학왔었다. 언니들 밑에서 공부하는데, 언니들이 나에게 “시키는”것이 그렇게 하기 싫었었다.
“청소해라, 빨래해라, 닦아라” 주로 그 3가지 였던 것 같다.
어린 중학교 시절, 겨울에 밖에서 빨래를 할라치면, 눈물부터 솟아오르곤 했었다.
그렇다고, 반항하는 성격도 못되서, 죽을 상을 하면서 해치웠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영향인지 모르겠다. 누구에게(그것이 가족이라고 해도) 무엇을 시키는 것이 싫다. 내가 해버리던지, 알아서 할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이 알아서 하겠는가? 주로 내가 하게 된다.
스스로 하기를 싫어했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언니가 혀를 차는 것이지만, <살림>보다는 딴데 마음이 더 가있다. 속속들이 정리정돈하는 습관이 배어있지 못하다. 나의 필요에 의해 하지 않고, 항상 누군가 시킴을 당해서 했던 것이 이렇게 된것인가?
요즘, 언니를 보면서 많이 반성하게 된다.
어수선한 자유에서, 규율이 있는 반듯한 집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가 위대해 보인다.
내 흔들림은 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게다.
언니가 이제는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창고속까지 들먹인다.
갈수록 쌓이는 쓰레기를 치우자는 말이다.
살면서 해야하는일, 그러나 막상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해야될 때가 온 것 같다.
된통 임자를 만났다.
올 여름엔 쓰레기 치우기와 남은 집안정리로 바빠질 것 같다.
게으름으로 무장됐던 <하릴없는 세월>은 먼곳으로 흘러보내야 한다.
진짜 살림꾼처럼 살아내는 날, 나의 흔들림도 진동을 멈추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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