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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우리가 서로로 인해 행복하기를..

1990년 추운 3월의 밤쯤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제2의 한인타운으로 불리던 웨스턴 지역의 한국식당을 찾았다. 캐나다서 첫선을 보는 자리다. 신문사에서 알게된 분이 나에게 소개해준 남자는 한국에서 갓 유학온 나이든 총각이었다. 그는 캐나다에 있는 삼촌과 연이 닿아서 직장을 다니다 유학왔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지 않았나싶다. 한국식 바바리를 입고 춥다며 손을 비비며 들어서서 앉는 그를 보자, 내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
그러곤, 그 심장멎는 소리의 이유를 해독할 수 없어서, 나는 “어디서 나와 저렇게나 비슷한 사람이 나타났을까? 정말 생긴것까지….”이렇게 생각했다.
심상치않은 예감이 들었다.
소개해주신 분이 이것저것 말씀을 해주시곤 자리를 피해주셨다. 추운 거리를 조금 걷다가, 그 지역의 빵가게를 들어갔던가? 나는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그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눈에 끼고있던 렌즈가 건조해져서, 눈이 아리고 아프기까지 했다. 혼자서만 끙끙 앓느라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일반적인 청년들마냥, 자신의 청사진을 펼쳐보였던 것 같다. 이런 저런 공부를 해서, 요렇게 조렇게 살고싶다고.

우리의 첫만남 이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결혼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딸이 데이트에 바쁘고, 그 남자를 집에 데려오기까지 하게 된다.

그 남자는 여자집안의 약간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 첫번째 요소는 유학생이란 것이다. 당시 영주권자(그게 뭔지..)였던 나는 <영주권>을 노리고 결혼하는 사기결혼이 많다는 형부의 반대에 서슬이 파래진다. 이 남자에게는 알리지않고, 형부를 찾아가서, 당돌하게 그를 변호한다. 형부의 동생도 그런 비슷한 사기결혼을 당하고 혼자 늙어가는 처지라, 형부의 노파심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나를 막는 이유가 그렇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엄마도 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똑바로 보지못하고 눈을 어디다 둘지 모른다>는 둥 아주 교묘하게 흠을 잡았다.

그러나 <사랑에 눈먼> 나는 그런것에 넘어갈 수는 없었다. 결혼을 결정하기 전, 그와 진지하게 가족들의 반대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주로 유학생 신분인 것을 중점으로. 그때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혼해서 한국에 가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영주권이 탐나서 하는 결혼이라면 나는 한국에 나갈 용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죽고 살고 하는 그런 비장한 사태가 아니었음에도, 그리고 상투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놓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말에 믿음이 갔다.

나 역시 이 남자가 사기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사기당하고, 내 나라로 돌아가자. 이곳에서 부끄러워 못산다면, 다른 삶을 개척해야 한다면 내 나라로 상처받은 맘을 갖고 가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정신무장까지 했다. 어쨋든 우리 둘이 이렇게 마음을 잡자 일은 더이상 걸릴 것이 없었다.
나 없는 데서 주변인들은 <얼마나 잘사나> 두고 보자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 역시 어떤 여자가 <저 사람은 내 남편>이라고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결혼하고도 한동안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일도 아닌데 이민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이 많다보니, 유학생과 결혼한다는 것이 큰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사실 말하자면, 나는 남녀평등주의자였다. 남자 여자가 다르고, 여자가 열등하게 대접받는 세상에 한탄한 사람이었고, 세계전쟁의 마지막은 <성 전쟁>이 될 것이라고 멋지게 혼자 장담하기도 했었다. 물론 대학시절에 받은 푸대접이 그 큰 요인이 됐다.

그래서, 친해지면서 그 남자에게 조건을 걸었다.
“나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부엌일을 비롯한 가정일을 같이하길 원한다. 둘째는 아이들에게나 나에게나 군림하는 남편은 싫고, 친구처럼 아이들에게도 함께 놀아주는 권위없는 아버지가 됐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것 처럼 쉽게 응락을 해서 그해 8월에 결혼을 하게됐다.
우리 주례를 맡고, 결혼전 <결혼공부>를 시켜주셨던 목사님이, 사귄기간이 너무 적다고 지적해주셨다. 그러더니, 우리의 말을 듣고 사귄 기간은 적지만 매일 만났으니, 만남의 횟수로 보면 그런대로 결혼할 자격이 있다고 통과시켜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13년후…. 어느날 아침
여자는 남자에게 한참 혼난다. 그날은 성경공부를 가야하는 날이었다.
하루전날 남자가 주문해놓은 것을 여자가 하지 않았다. 아이들 연주회가 있고 어쩌고 저쩌고 바쁜 날이었다. 그래서 잊었다.

주로 남자가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요즘엔 조금씩 여자에게 맡긴다. 그중 하나를 여자가 수행하지 못한 것. 여자는 처음엔 조금 하다가 끝나려니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간 참아온 것들인지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다.

성경공부를 가지 않기로 하고, 언니 혼자 보낸다.
그리곤, 그에게 말할 기회를 더 준다. 나는 훌쩍거린다. 내가 알고있는 나의 단점들이 다 나온다. 시간이 지나고 진정기미가 되었을때, 내가 적겠다고 한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
적고났더니 한가지뿐이다.
“잊지말라”-가볍게 생각해서 항상 잊어버린다. 조그만 일도 신중히 해라.

그렇다. 남편이 나간김에 은행까지 들려오라고 하면, 나가서 다른 일에 빠져 은행일은 잊고 온다. 주로 남편의 부탁을 잊는다. 그게 큰 병이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혼 13년이 지난 오늘, 그와 나의 자리가 완전히 바뀌었다.
여왕이던 내 신분이 이제는 그의 비서가 됐다. 요즘은 비서일을 제대로 못해서, 이렇게 시말서를 쓰게 되기도 한다.

남편이 조금씩 무서워지고 있다. 그에게 권위가 생기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이들이 오해하려나.. 물론 그는 결혼때 약속대로 집안일의 많은 부분을 담당한다. 바깥일이 많아져서 못할뿐이지, 걸레드는 것도 나보다는 그가 더 자주 한다.
나는 그를 떠받들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13년간 해오지 않았던 것. 그것이 가끔은 힘들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제는 그가 아내사랑을 제몸사랑하듯이 해야한다. 그래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데. 그의 사랑을 끌어낼 묘약을 자꾸 찾아내야한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로 인해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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