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다닐때였는지, 바로 그후였는지, 아니면 그 둘을 걸쳐서였는지 정확하지 않다.
서울의 외곽인 남양주의 싼 연립주택 두 방을 얻어 동생 둘과 자취생활 하던 때다.
일요일이면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이미 서울 한복판을 벗어나 살던 때이니, 조금만 차타고 들어가면,
들판도 보이고, 작은 마을들이 하나둘씩 있었다.
아무 마을이고 내려서 교회를 찾는다.
시간이 맞으면 예배도 드린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몇달에 걸쳐 그런 순례를 되풀이 했다.
매번 다른 장소를 찾아간다.
어디고 구원은 없다. 습관적인 예배와, 형식적인 말씀만 있다.
일요일을 그냥 보내지 못하겠는 그런 마음, 한가닥 신앙의 끈을 잡아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고 또 기억에 남는 일.
실업자가 되어 세상이 암울해 보이던 때, 언니를 쫓아 한적한 곳에 있는 기도원에 찾아갔다.
목회 지도자를 위한 기도세미나 같은 형식의 모임이었는데,
그 설교의 요지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론이었다.
그곳에서 내게 접수된 결론은
"믿는자가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려면,
이 세상에서 발을 빼라.
이세상에 속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는 것이었다.
잠자고, 먹고, 기도하고, 설교듣는 시간밖에 없었던 그 기도모임에서,
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은 완전히 악한 곳"이며
"세상사람과 다른 생활을 하다가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로인가 찾아갔던 낙엽진 교정을 걸으면서,
"그런 게 믿는 것"이라면,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곰곰 생각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을 읽었다.
그래, 한번만 읽어보고, 이곳에서도 그 어떤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만 두자.
믿는다는 것에 더이상 매달리지 말자는 생각이었고,
신약성서를 읽고난 후에도 별다는 "감동"이 없어서,
그만 하나님과 예수와 나와의 관계는 새로운 만남을 하게 되기까지
긴시간 동면에 들어가 있었다.(나는 그때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며칠전에 좋은 책을 읽었다.
화계사에 승려로 있는 현각스님이 지은 책이다.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이 스님은 미국인이다.
가문이 좋은 가톨릭가정에서 태어나, 수도사를 꿈꾸던 사람이
승려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현각스님의 진리를 향한 여정은 내가 위에서 말한 나의 방황보다,
수준이나 정도가 몇배가 넘을 지 모르는 곤고한 길이었다.
천재소리를 들으면서 자라난 그는, 예일대학 하버드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진리"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문들을 풀길이 없었다.
그러다 만난 스승이 숭산 큰스님.
미국사회에 불교를 심는데, 지대한 공이
있는 숭산큰스님은,
"거짓"이 아니라 "참 진리"를 설파한다고 느꼈다.
그러곤 낯선 종교에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 와중에서 아들을 믿었던 부모의 기대를 배반하게 되고,
남편감으로 믿어의심치 않았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되고,
물선 한국의 화계사로 삶의 터전까지 옮기게 된다.
우선 책 표지에 나오는 그의 표정이 참으로 "구도자"의 모습이다.
그의 번뇌와 절망앞에 안타까움이 일었는데,
그는 나름대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듯 보인다.
그의 어린시절과 가족들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생화학박사로 마음이 열린 독서광이며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면서 가족에 헌신적인 완벽에 가까운 여성이다.
그의 어머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오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의 길도 인정하마"라고 말이다.
이와같이 현각스님은 종교의 공존을 원하는 것도 같다.
기독교안에 들어간 불교, 성당에서 법문하는 이야기등, 서로가 서로를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도 그가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인이다. 이와같은 것을 "다원론"이라고 하나.
특이한 내용중 그는 한국사람과 한국문화도 대단히 좋아한다.
내 문화를 보잘것없게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다.
어쨋든 그는 먼길을 돌아서 일단은 불교에 귀의한 것 처럼 보인다.
참선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일례로 1천8백번 절을 해야하는 고행도 즐거이 감내한다.
그러나 그후의 일은 아직 알길이 없다.(나는 그가 다시 개종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선입관은 있었다.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은 내 종교에 대한 불경(不敬)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었다.
어떻게 내 태도를 결정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현각스님을 보면서 한가지,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심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 성경공부할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예수를 잘믿던 목회자가
죽을때가 되어서 "회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기론, 그는 천국에 못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까?
하나님이 그렇게 속이 좁으신 분일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모인 사람들이 했었다.
내가 심판을 하려고 하는데서, 성경구절을 들이대며,
정죄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현각스님의 끝없는 방황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똑똑하고, 바른 한 청년이 설자리를 모르고
헤매는 그 모습은
마음이 비어있는 많은 선남선녀들을 생각나게 한다.
내 경험으로는 진리는 그렇게 애타게 찾아서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뭐라 말할까?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고 해야하나.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면, 마음문을 열고 작은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가야할 길이 조금씩 보일 것이다.
서울의 외곽인 남양주의 싼 연립주택 두 방을 얻어 동생 둘과 자취생활 하던 때다.
일요일이면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이미 서울 한복판을 벗어나 살던 때이니, 조금만 차타고 들어가면,
들판도 보이고, 작은 마을들이 하나둘씩 있었다.
아무 마을이고 내려서 교회를 찾는다.
시간이 맞으면 예배도 드린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몇달에 걸쳐 그런 순례를 되풀이 했다.
매번 다른 장소를 찾아간다.
어디고 구원은 없다. 습관적인 예배와, 형식적인 말씀만 있다.
일요일을 그냥 보내지 못하겠는 그런 마음, 한가닥 신앙의 끈을 잡아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고 또 기억에 남는 일.
실업자가 되어 세상이 암울해 보이던 때, 언니를 쫓아 한적한 곳에 있는 기도원에 찾아갔다.
목회 지도자를 위한 기도세미나 같은 형식의 모임이었는데,
그 설교의 요지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론이었다.
그곳에서 내게 접수된 결론은
"믿는자가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려면,
이 세상에서 발을 빼라.
이세상에 속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는 것이었다.
잠자고, 먹고, 기도하고, 설교듣는 시간밖에 없었던 그 기도모임에서,
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은 완전히 악한 곳"이며
"세상사람과 다른 생활을 하다가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로인가 찾아갔던 낙엽진 교정을 걸으면서,
"그런 게 믿는 것"이라면,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곰곰 생각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을 읽었다.
그래, 한번만 읽어보고, 이곳에서도 그 어떤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만 두자.
믿는다는 것에 더이상 매달리지 말자는 생각이었고,
신약성서를 읽고난 후에도 별다는 "감동"이 없어서,
그만 하나님과 예수와 나와의 관계는 새로운 만남을 하게 되기까지
긴시간 동면에 들어가 있었다.(나는 그때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며칠전에 좋은 책을 읽었다.
화계사에 승려로 있는 현각스님이 지은 책이다.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이 스님은 미국인이다.
가문이 좋은 가톨릭가정에서 태어나, 수도사를 꿈꾸던 사람이
승려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현각스님의 진리를 향한 여정은 내가 위에서 말한 나의 방황보다,
수준이나 정도가 몇배가 넘을 지 모르는 곤고한 길이었다.
천재소리를 들으면서 자라난 그는, 예일대학 하버드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진리"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문들을 풀길이 없었다.
그러다 만난 스승이 숭산 큰스님.
미국사회에 불교를 심는데, 지대한 공이
있는 숭산큰스님은,
"거짓"이 아니라 "참 진리"를 설파한다고 느꼈다.
그러곤 낯선 종교에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 와중에서 아들을 믿었던 부모의 기대를 배반하게 되고,
남편감으로 믿어의심치 않았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되고,
물선 한국의 화계사로 삶의 터전까지 옮기게 된다.
우선 책 표지에 나오는 그의 표정이 참으로 "구도자"의 모습이다.
그의 번뇌와 절망앞에 안타까움이 일었는데,
그는 나름대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듯 보인다.
그의 어린시절과 가족들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생화학박사로 마음이 열린 독서광이며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면서 가족에 헌신적인 완벽에 가까운 여성이다.
그의 어머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오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의 길도 인정하마"라고 말이다.
이와같이 현각스님은 종교의 공존을 원하는 것도 같다.
기독교안에 들어간 불교, 성당에서 법문하는 이야기등, 서로가 서로를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도 그가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인이다. 이와같은 것을 "다원론"이라고 하나.
특이한 내용중 그는 한국사람과 한국문화도 대단히 좋아한다.
내 문화를 보잘것없게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다.
어쨋든 그는 먼길을 돌아서 일단은 불교에 귀의한 것 처럼 보인다.
참선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일례로 1천8백번 절을 해야하는 고행도 즐거이 감내한다.
그러나 그후의 일은 아직 알길이 없다.(나는 그가 다시 개종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선입관은 있었다.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은 내 종교에 대한 불경(不敬)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었다.
어떻게 내 태도를 결정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현각스님을 보면서 한가지,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심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 성경공부할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예수를 잘믿던 목회자가
죽을때가 되어서 "회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기론, 그는 천국에 못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까?
하나님이 그렇게 속이 좁으신 분일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모인 사람들이 했었다.
내가 심판을 하려고 하는데서, 성경구절을 들이대며,
정죄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현각스님의 끝없는 방황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똑똑하고, 바른 한 청년이 설자리를 모르고
헤매는 그 모습은
마음이 비어있는 많은 선남선녀들을 생각나게 한다.
내 경험으로는 진리는 그렇게 애타게 찾아서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뭐라 말할까?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고 해야하나.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면, 마음문을 열고 작은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가야할 길이 조금씩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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