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가 축축히 젖어있다.
쌓인 눈이 날이 풀리면서 녹아들고,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 많으니, 나무가 많은 곳은 거의 늪지대처럼 변해간다.
폭설의 무게에 못이겨, 나무들이 얼기설기 쓰러져있다.
작은 가지가 꺽인놈부터 몸이 반쯤 잘라진 것,
어떤 나무는 뿌리채 뽑혀져,
흰눈을 뒤집어쓰고 있을때는 어떤 예술품같기도 하더니,
온몸이 재색으로 나무의 생명이 끝났음을 만방에 알리고 있다.
이제 봄이 무르익으면,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나무들은 새생명을 피울테니만,
고꾸라진 나무들은 새들의 쉼터와 버섯들의 양식장으로 이용되기나 할려는지.
어제 이곳 일간지들의 탑뉴스는 “세실리아양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스런 소녀를 잃었다”라는 제목밑에
아시안 소녀가 수줍게 웃고있는 사진이 모두의 마음에 충격을 준다.
작년 10월 자신의 침대에서 실종됐던 그 아이는 10번째 생일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이미 죽음으로 변해있는 걸 산책하던 이가 발견했다.
매일매일 기도를 드렸다는 중국인 부모들의 희망은 이제 접어야만 한다.
유괴당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초기부터 전국의 관심을 모으고, 수사가 진행됐지만,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재능이 많고, 천진스런 외동딸을 잃어버린 그녀의 부모맘을 생각하면,
그아이가 죽기직전에 겪었을 그 고통과, 공포등을 상상이라도 할라치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공지영의 소설 “착한 여자”를 읽었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로왔다. 중요한 것은 그 주인공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이, 흥미를 위한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공지영은 여성적 입장에서, 삶의 언저리에 몰린 여성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고싶었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비판했던 작품들(소설들)이 사실은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삶의 모습들을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탐욕, 거짓, 정욕의 본성을 드러내고, 선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몰염치를 싫어했었다.
그런데 아니다.
이제는 삶이 그렇게 비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부조리가 녹아들어, 가치관 자체가 흔들리는 작금의 사회에서는 더욱.
공지영뿐 아니라, 박완서의 소설 “저문날의 삽화”도 시작이 참 좋았다. 나는 그 처음처럼 마지막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노년을 서로 열심히 사랑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보내는 노부부의 이야기.
그렇게 저물어간다면, 인생이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는 그런 빛나는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단 하나의 바람, 자식들보다 먼저 죽고싶어하는 그 하나의 바람이 아들며느리의 자동차 사고로 깨어진다.
인생은 깨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작가들에겐,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렇게 가까운 데서 예기치않은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죽음은 참으로 많은 것을 되집게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못지않은, 상처들이 곳곳에 있다. 관계의 흔들림,,,, 그리고 싸움과 원망등.
소설과 실제 삶을 통틀어서 그런 모든 것들이 요즘 나를 잡고 놓지 않는다.
내가 겪지않으니 다행인가? 그렇지도 않다. 나만 비켜가준다고 누가 장담할까?
그리고 내가 아는 이들, 그들의 참담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수리가 당긴다.
그렇다고 해결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가까운 이들의 고통…이 말이다.
요즘은 나를 되돌아본다.
나는 참으로 모범적인체했구나, 어느정도냐 하면, 너무 모범적이어서, 드라마든, 소설이든, 삶이든, 비틀린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상처에 대해 딴청을 부린다.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누가 나에게 상처를 나누려고 하겠는가?
이렇게 단순하고, 앞뒤로 막힌 인사에게.
한번 죽어진 나무들은 다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죽음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부러진 나무가 정상의 삶을 살아가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혹은 바람에 의해서건, 혹은 너무 많은 양의 눈 때문이건,
혹은 나이듦이건,
그리고, 나날이 스스로를 강하게 키우지 못했던 냐약함 때문이건,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는다.
이제는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리라.
단지 그것만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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