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학교에서 하는 연설대회 주제로 우리집에 머물렀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고 했을 그들과 겪었던 우여곡절이 생각나 좀 신경이 날까로와지는 것을 느꼈다. 특별히 둘째가 내게 들고난 아이들의 나이와 우리집에 온해, 떠난해를 꼬치꼬치 물으니, 하나하나 기억하기에 벅찰 정도로 그 숫자가 대단했다는 것에 스스로 질려버렸던 것 같다. "얘, 그런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문화의 차이 이런 걸 써야 하는 것 아니니?" 하면서 짜증도 냈다. 나중에 딸의 글을 읽고보니, 내게 무거웠던 일들을 가볍게 적어놓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의 결정에 따라주면서, 나름대로 어려움도 많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외국에 나와 사는 교포들에게 한국의 친지들의 아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일들이 일반적인 일이 되어간다. 나는 일단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둘째의 눈에는 아직도 엄마를 믿지 못하는 듯하다.
사람일이라는 게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홀가분함"이 너무 좋아서 쉽게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못할 것 같다. 어쨋든 그동안 별탈없이 아이들이 머물다 돌아가서 여만간 다행인 것이 아니다.
Exchange Students
A speech by Janet Song
How would you feel if you lived in the same house as someone you barely knew, had barely talked to, and on top of that you didn't even speak the same language?
잘 알지도 못하고, 의사소통도 많지 않고, 게다가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사람이 한집에 사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보셨습니까?
Mr. Brown and class;
I know how it feels.
브라운 선생님, 그리고 여러친구들,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Ever since I was seven years old my family has been housing relatives and friends from Korea. Basically, someone asks if they're son or daughter can stay with us for a while to learn English. My parents usually are not the kind to say no. In total we've had eleven kids stay with us in the past 6 years.
제가 일곱살이었던 때부터 우리 가족은 자신의 아이들의 영어학습을 원하는 부모의 요청으로 그들의 자녀들을 맡아 숙식을 제공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제 부모님은 남들의 요청에 "No" 를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지난 6년간 11명의 아이들이 우리집에 머물렀었습니다.
The method of sending children from Korea to English speaking places is very common. Kids usually stay for a couple of months, maybe years. If you are fluent in English chances are you will get a very good job in the future. I found all the kids who have stayed with us have went home with excellent, improved English, so it is safe to say this process is very effective. I guess all the time away and all the hard work does pay off.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어하는 환경에 아이들을 보내는 방법은 일반적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머물러서 영어를 잘하게 되어 장래에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면 여러분도 같은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가 볼때 이들이 우리집을 떠날때는 영어실력이 많이 향상되어있었다고 생각하니, 이런 방법이 효과적인 것도 같습니다. 그들이 치렀던 많은 수고의 댓가가 주어졌다고 봅니다.
The first exchanges who came were my two cousins Michelle Kim, 15 and Mike Kim, 13 in the fall of 2000. The following year my dad's cousins son, Terry Park, 15 and his good friend Jay packed their bags and moved in with us. They stayed with us for four years and went home during the summers.
처음에 우리집에 왔던 학생은 제 사촌인 미쉘과 마이크였습니다. 그들은 2000년 그 당시에 15살과 13살이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해 아빠 사촌의 아들인 테리(15살)와 그의 친구인 제이가 가방을 싸들고 우리곁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여름방학 기간에 고향에 돌아간 것을 빼면 거진 4년간을 우리집에 머물렀습니다.
Although I didn't know Korean, I still talked to them a lot. They weren't here to listen to me speak a language they already knew, right? It was my job to help them with their English. I spent most of my time talking to them endlessly about nothing important, and even though they didn't get a single word I said, I'm sure I helped.
나는 한국말을 할줄 몰랐어도 그들에게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면 그들은 이곳에 있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들의 영어공부를 돕는 것은 나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끝이없는 잔소리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 말입니다. 그들이 한마디 단어도 못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을 도왔다고 확신합니다.
In all the years they spent with us, we watched them gradually step into the Canadian culture. In Korea, things are more no-nonsense. They still kept up their studies very well, but for the most part they took a break from they're uptight lifestyles and did what teenagers do best; sleep. If they weren't eating or going out they were pretty much unconscious.
그들이 우리와 함께한 시간동안 우리는 그들이 캐나다 문화에 한발씩 다가서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보다 규범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학업에는 열중했지난 한국의 긴장에서의 해방감 때문인지 대부분의 시간들을 휴식으로 보냈습니다. 말하자면 십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잠자기" 같은 것이지요. 음식을 먹거나 밖에 나갈때를 제외하곤 그들은 대부분 정신없어 보였습니다.
In Korea, the school dress codes are very specific. Uniforms are essential and makeup, piercings, and certain hairstyles and dyes are strictly not allowed. They were loving the freedom, especially Jay. Everyday he would come home with a different hair colour, ranging from green to bright orange, the only colour he did not try was pink.
Soon enough the older three went their own ways and Mike was the only one left. He also decided it was time to go during 2004 and he went to live with his high school friend Whitney and her family.
한국에서는 학생들의 복장규율도 매우 특이합니다. 교복은 필수이고 화장, 피어싱, 그리고 어떤 종류의 머리염색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선호했고 특별히 제이는 그를 즐겼습니다. 거의 매일 그는 다른 머리색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초록색으로부터 밝은 오렌지색까지, 그가 유일하게 시도하지 않은 색은 분홍색 머리였지요.
위로 세 학생들은 가고 마이크 혼자 남겨졌습니다. 그는 2004년 그의 고등학교 친구인 위트니네 집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All four of them are currently attending University, Mike and Terry still in Canada, and Michelle and Jay in Korea.
현재 마이크와 테리는 캐나다의 대학에 미쉘과 제이는 한국의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When we thought we finally had the house to ourselves, MORE came! This time my mother welcomed three kids. My Aunts friends students, Alice, 10, Angelina, 10, and Jason 11, came in 2003, from January to February.
드디어 우리 가족끼리 살게 됐다고 여겨졌을때 "더"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 이모 친구의 영어제자들인 알리스(10), 앤젤리나(10), 제이슨(11)으로 2003년 1월부터 2월까지 머물렀습니다.
They were around my age and were not too bad at English, so communication wasn't a huge problem. Honestly, me and my sisters pretty much had enough of these intruders eating our food and watching our T.V. There was a lot of drama and fights and Korean/English yelling matches, but in the end, I can clearly recall me crying for hours and clinging to their bags when they had to go. The three flew back to Korea, fluent in English, and afterwards they took classes to keep it up.
그들은 내 또래 아이들로 영어실력이 나쁘지 않아 의사소통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데 나와 우리 자매들은 이 침입자들로부터 우리의 음식과 텔레비전 시청을 많이 방해받았습니다. 정말 많은 드라마같은 일들, 다툼과 영어와 한국어로 소리지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회상해보면 그들이 한국으로 떠나야 했을때 그들의 가방을 잡고 몇시간 동안 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 세명은 더 능숙해진 영어실력을 가지고 한국으로 날아갔고 그들은 영어공부에 박차를 가했을 것입니다.
Okay, it was over, no more. NOT. In 2005 January ANOTHER three pranced through our doorway. I had met my mom's cousins two sons, Evan, 15 and Phillip, 14 in Korea one year ago. Back then, the only word they could say was "Peace."
자, 이제 끝났습니다. 더이상은 없습니다. "아닙니다" 2005년 1월에 "또 다른" 세명의 학생들이 우리집문으로 의기양양하게 들어왔습니다. 나는 엄마 사촌의 아들들인 에반(15)과 필립(14)을 1년전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당시 그들이 말할 수 있는 단 한마디는 "피스(평화)"뿐이었습니다.
When they came to Canada, they expanded they're vocabulary to "Peace MAN" and a whole bunch of mispronounced swear words. one more boy came with them. His name was Jason, not the first Jason, but a different Jason. He was my Aunts friends son.
그들이 왔을때 어휘력을 "피스 맨"으로 늘렸고, 각종 잘못발음된 "영어욕설"이 섞여있었습니다. 이모 친구의 아들인 제이슨이 그들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첫번째 제이슨과 다른 사람입니다.
My sisters and I spent a lot of time watching movies with them to improve their English, and watching them break-dance. Although all of the exchanges were fun I'd have to say Evan, Phillip and Jason were the best because they were so funny and just made sure they had a great time while learning English. I am proud to say that now they're English is probably better then mine.
우리 자매들은 그들과 많은 시간 영화를 같이 보면서 그들의 영어향상을 도왔고, 그들이 추는 브레이크 댄스를 구경했습니다. 그동안의 학생들중에 에반, 필립, 제이슨과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들과의 시간은 흥미로왔고, 그들도 영어를 배우는 동안 좋은 시간들을 가졌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말하건데, 그들의 현재 영어실력은 나보다 더 나아졌다고 여깁니다.
In 2006 November Phillip also moved in with Whitney. Evan went to Stradford to live with my Aunt and now works and attends school there. Not long after Jason went to Whitney's too, and again we were alone.
You will probably see Phillip You and Jason Lee around the halls in WDSS.
2005년 11월에 필립이 위트니의 집으로 옮겼고, 에반은 스트랫포드에 있는 이모집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학교다니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슨도 위트니네 집으로 합류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다시 우리끼리만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워커튼 고등학교(WDSS)에 가면 복도에서 제이슨이나 필립을 보게 될 것입니다.
Ten down, one more to go. Most of you probably know the next girl I am going to be talking about. My second cousin Diane Yoo came 2 months ago on November 15 2006. She only stayed for a short period of time, and I didn't talk to her much because the only things she really said and understood was Hello and Goodbye.
열명은 가고 한명이 더 남았습니다.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내가 말하려는 마지막 소녀를 잘 알 것입니다. 사촌뻘이 되는 다이앤 유는 작년 11월에 왔습니다. 그녀는 짧은 시간동안 머물렀지요. 나는 그녀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이해하고 잘말할 수 있었던 것은 헬로와 굿바이 정도였습니다.
When my friends came over they would try and talk to her and she would just look at me confused. Every time I would shrug because I'm not the one to play translator. Leaving many new friends behind Diane left on January 14 2007. Hopefully everything she learned was worth not spending Christmas or New Years at home.
내 친구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자 하면 그녀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나를 건네다 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통역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이앤이 새로운 친구들을 뒤에 두고 1월14일 떠났습니다. 그녀가 이곳에서 배운 것들이 가족들과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함께 보내지 못한 것을 상쇄할만큼 가치있는 것이길 바랍니다.
Although my Korean still is not as good as it should be, I learned a lot from the kids who learned from me. I am glad to have the time right now alone with my family but I wouldn't change if I could all those exchange students staying with us. I know there are going to be more, much more and some people I'm not going to like as much as others.
이러한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나의 한국말은 아직 좋지 못합니다. 나는 나로부터 배운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지금 가족들끼리 있는 것이 기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변화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에 사귀었던 아이들만큼 친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Housing people that I don't know has really helped me to accept people as they are because even if you dislike them you are still going to have to live with it. Sometimes its hard but I know if I were them, I would really appreciate it.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살았던 것은 내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싫어한달지라도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내가 그들이었다면 그런 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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