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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바벨... 연쇄사건 속에 있는 "단절"의 모습들

 

언어가 다른 사람들.

그들은 내게 하나의 물체였다.

이민와서 가장 크게 느낀 소외감은 내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내가 놓인 거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나는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그들을 또한 내가 아는 사람의 범주에 집어넣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이 해결된 것이 신기하고 고맙기만 하다.

 

 


모로코 여행을 하던 수잔이 알수 없는 곳에서 날아온 총에 부상을 당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브랜쳇(Cate Blanchett)이 부부역을 맡았다.

 

영화 바벨에 보면, 네가지 이상의 언어가 나온다.

영어, 모로코어, 일본어, 스페인어 그리고 어느 장면에선가, 프랑스어가 잠시 나왔던 것 같다.


연기자들은 제나라 언어로 말하는 것을 영화에서는 자막으로 처리해준다. 언어 만큼이나 그들 사이에 문화의 간격이 크다. 내가 가보지 않은 나라(미국을 제외하고)들의 문화가 정말 생경하게 다가왔다.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에 의해 흩어진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함께 하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큰 그릇에 밥과 반찬이 뒤범벅된 음식을 만들어 온 가족이 손으로 밥을 둥글려 집어먹는 모로코 가정. 흑집에 앉아서 한구석에서는 부인이 불을 때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멕시코는 흥에 겹고, 자유분방하지만 가난해서 이웃나라 미국에 불법체류한 사람들이 많다. 치안이 염려스럽고, 안정되지 않은 사회가 나를 해꼬지할 것만 같다. 일본은 경제대국, 모든 기계문명이 첨단을 달린다. 도시의 휘황한 불들, 고층 아파트, 그리고 그안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핵가족 문화. 미국이란 사회는 안정되고 부유한 사회지만, 총상맞은 부인과 그 남편을 남겨놓고 내빼는 광관단들의 처사. 자신만의 안위에만 신경쓰고, 다른 것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냉소적인 모습이 그 선한 가면 뒤에 감춰져있다.


바벨은 이렇게 단절된 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그 단절이 끊어지고 맥이 흐르게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유쾌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왜인가? 서로를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놓기 때문이다.


사건은 모로코를 여행중인 관광차에 타고있던 미국인 여자 수잔이 총상을 입는데서 시작된다. 그들은 셋째 아이를 잃고 “치유여행”차 나섰던 자리였다. 그 총은 모로코 가축농가의 남자가 친구에게서 구입한 것이다. 염소를 해치는 자칼을 잡으려는 용도였다. 호기심 많은 십대 소년에 의해서 "연습삼아“ 그 총을 쏜 것이 이런 큰 일을 저지르게 된다. 이 한 사건은 이들이 속해있는 모국 미국, 멕시코, 일본, 모로코를 돌면서 돌풍처럼 영향을 일으킨다.


주요 인물을 쫓다보면 영화의 줄거리와 함께 왜 이 일이 서로 얽히게 됐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멜리아>


멕시칸이다. 리차드(브래드 피트)와 수잔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다. 주인의 여행기간 동안 두 아이를 맡고 있는데, 주인 부부가 사고로 집에 돌아오지 못하자, 멕시코에서 열리는 자신의 아들 결혼식 참석이 어려워진다.

“내가 잘 생각해 댓가는 충분히 치르겠소. 가지 말고 아이들을 돌봐주시오”가 리차드가 전화로 요구한 사항이다. 아멜리아는 아이들을 다른데 맡기려고 노력하다 안되자, 그 아이들을 동반하고 결혼식에 참석한다. 문제는 조카 산티아고의 운전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발생, 미국국경에서 걸린다. 왜 백인아이들을 남미인인 너희들이 데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이들 유괴범으로 몰릴 지경이다. 조카는 경찰을 피해서 그대로 달아나다가 국경 근처 황야에 그들을 내려놓고 도주한다. 아멜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돌본 두 아이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수비대에 걸려 구출되지만 그녀는 이민국으로부터 “자진출국”을 권유받는다. 16년 동안 불법체류한 것이 들통난 것이다.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 그녀에게 담당조사관은 “신경쓸것 없다”고 묵살하고, “그 아이들은 내 자식이나 다름없다”는 그녀에게 모멸에 가득찬 목소리로 “네 자식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국경 근방에 고립된 아멜리아와 리차드의 어린 딸.


<시에코>

 

일본 고등학교 소녀다.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그녀의 겉모습은 일반인과 다를바 없다. 이성에 관심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젊은 아이들은 그녀를 괴물취급한다. 그녀는 속으로 곪아가고 “성도착증” 증세까지 보인다. 그건 최근에 자살한 그녀의 엄마 때문에 더 그렇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냥을 좋아했다. 수년전 모로코에 사냥가서 좋은 가이드가 되어주었던 모로코 농부에게 자신의 사냥총을 선물했다. 그 총으로 인해 이번 사건이 벌어진다. 어쨌든 시에코와 그녀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일본 사회의 숨막히는 단절감을 읽을 수 있다. 가령 시에코는 친구들과 조명이 번득이는 “바”에 간다. 그러나 마치 영화가 잠시 중단된 듯이 모든 소리가 없어진다. 미칠듯이 울리는 소리가 없이 몸을 흔들어대는 일본 젊은 아이들과 시에코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시에코는 들리지 않는 사회에 떨어진 고아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가 몸을 마구 흔들고, 남자아이들의 몸에 부딪치더라도 그녀는 결국 걸러내지는 작은 돌덩이임에 분명해 보인다. 제게 관심보였던 남자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집으로 와서 아빠를 찾던 형사를 부른다. 그녀는 그 형사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며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일본 농아 소녀.. 속옷을 벗고, 저를 놀리는 남자아이들을 위해 다리를 벌렸다. 

린코 키쿠치가 이 역을 열연했다.

 

<모로코 소년>

 

아버지와 형을 도와 염소치는 것을 돕는다. 몇마일 걸어가야 다른 집이 하나 나오는 외따른 곳에서 가족이 산다. 이제 열세살쯤 되어보이는 그 소년은 성에 대해 민감하다. 누나(혹은 여동생)가 옷갈아입을 때마다 몰래 훔쳐본다. 아니, 그 누나도 그가 훔쳐보는 줄 안다. 가족만으로 이뤄진 사회에서 근친상간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소년은 염소를 치러 가서 멀찌기 떨어져 앉아 혼자 자위를 한다. 애 늙은이같은 얼굴표정을 하고. 그 소년은 또한 형보다 총을 잘쏜다. 자칼을 잡으려다 놓친 형을 무시하고 총을 잡는다. 그리고 그 총을 시험해보다가 이런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사막의 비문명권에서 사는 형제. 

 

<리차드>

 

중산층 미국 가정의 가장역이다. 브래드 피트가 이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역의 비중이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져있어 모두가 주인공이면서 조연인 그런 영화이다. 브래드 피트가 아니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 같다. 아마도 상업적인 것을 염두에 둔 까닭일 게다.  어쨌든 그는 갓 태어난 셋째아이가 죽자 그 충격으로 잠시 집을 나갔었던 것 같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잃은 슬픔에 더하여, 남편이 집을 나가 절망에 빠진 부인을 데리고 모로코 여행을 계획한다. 좋은 집, 행복한 가정위에 구름이 드리운 것을 걷어내기 위함이었겠다. 그런데, 부인이 어깨에 총상을 입어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대사관측은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본다. 모로코 정부와의 관계와 여러 가지 정치적인 사건들이 맞물려서 바로 후송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영어를 할줄 아는 모로코인 가이드의 가정에서 민간치료를 받게 된다. 나중에 헬리콥터로 후송이 될 때 리차드는 그 모로코 남자에게 “돈”을 주지만 그는 받지 않는다. 모국에서 함께 여행길에 나섰던 이들이 본인들의 안전과 건강을 생각해 관광차를 타고 내뺀 것과 대조를 이룬다. 부인은 남편의 간호와 염려로 그간에 쌓아놓은 불신을 털어버리는 계기가 된다.

 

  *      *     *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여러 부분에 후보로 올랐었다. 그런데 오직 작곡상 하나를 받았다. 수잔이 총상을 당하기전, 관광객들이 탄 차가 모로코 산지를 지난다. 차창밖으론 무심하게 아랍여인들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왔다갔다 하는 모습도 보이고, 사진기를 쳐들고 미국인들이 한담에 빠져있다. 그때 흘러나온 음악은 정말 무슨 일인가가 발생할 것 같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한음 한음을 튕기듯 뜯어내는 가야금 소리 같다고나 할까? 전반적으로 소리가 잘 처리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시에코의 세상도 관객들이 경험해야 했고, 불안한 가운데 흥이 있는 멕시칸들의 음악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에겐 들리지 않는 제 나라말로 말하는 연기자들에게선 “언어장벽”을 또한 같이 느껴야 했다.


영화가 준 것은 이 세상에 우연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소통이 단절을 초래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것도 있다는 걸 또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아멜리아와 이민관의 대화. 그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지만 아이들과 주인집을 위해 헌신했던 아멜리아의 희생은 결국 보상받을 길이 없게 된다. 오히려 미국사회에 기생했던 “불법체류”의 낙인만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미국 사회가 불법체류자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보여준 부분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풀기힘든 많은 숙제를 준다. 1차적으로 서로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언어, 문화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어떤 나라(모로코)에서는 “낙후된 문화”가 문제이기도 하고, 어느 나라(일본)에서는 “대중속의 고립”이 문제이기도 하고, 어느 나라(미국)에서는 “나의 안위만이 중요”하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아멜리아를 볼때 “조금 못살더라도 왜 제 나라에서 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나라마나 사람마다 그 문제가 조금씩 다르다. 이런 것들을 다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그리고 이 영화의 장점이라면 꼼꼼한 장면처리와 복선을 깔고있는 대사들이다. 4나라를 묘사한 것이 무척 사실적이다. 내가 모르는 나라지만, 그 영화가 빈틈없이 다뤄졌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영화가 짜깁기한것 같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된다. 쉽지않은 주제를 감독 아모레스 페로스(Amores Perros)는 잘 엮어냈다. 그가 만들었다는 " 21 Grams"도 기회가 되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 거친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화의 주제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전개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볼 기회는 그렇게 자주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