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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150년전의 자연주의자... "소로"를 탐색하다

 

"월든(Walden)"이란 책이 있다.

작가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이다. 1817년에 태어났다.


내가 그를 몰랐다고 해서, 그가 유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내가 그를 안다고 해서 그가 유명한 것은 또한 아니다.  어쨋든 그는 19세기의 미국 사상가중 한명이라는 것이다. 그가 미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지는 또다른 숙제의 부분이다.


실상 그의 책은 나의 취향은 아니다.  “나의 책 읽기”를 큰 써클로 가정해 본다면 그 핵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글, 시간이 오래지 않은 것, 장편소설류.. 등이다. 그 핵에서 벗어나면, 단편소설도 들어가고 수필도 들어가고, 종교서적도 있고, 외국작가의 소설류 등이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헨리 데이비스 소로의 책은 서클의 가장 마지막쯤에 걸쳐있는, 그런 책인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태어나서 내가 태어나던 해의 100년전에 죽은 저 멀리 이국땅에 살던 한 청년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이다.(그렇다고 해서 그에 관한 귀동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로의 작품을 대하면서, 너무 근시안적이고 속물적인 독서경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하나 건진 것이 있긴 하다.  아마도 독서 범위가 넓은 독자께서는 소로가 누군지도 몰랐어 하지 않을런지..


그날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두툼한 "월든"이란 책이 눈에 띈다. 산속에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산 사람의 기록이다. 처음부터 호흡이 길다. 대강 훑어보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글을 잘쓰는 사람이나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 한다고 비유한다. 그것처럼 소로의 글도 끊어지지 않았다. 문장이 끝난듯 하면서 다음 문장을 떠밀어주고 있었다. 내공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부족한 내게는 그의 긴 호흡이 청량한 산소처럼 느껴진다. 뱉어내고 뱉어내도 또 할말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자연주의자라는 표제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의 이번 책은 자연관찰기로 보여졌다. 어쩌면 나처럼 "한적"한데 사는 사람이 읽기에 적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로의 "월든"


 

그가 어떤 사람인가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책의 날개를 보니 미국의 수필가이자 시인, 실천적 철학자란다.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출생으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잡지등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845년부터 1847년까지 메사추세츠주에 있는 "월든" 호수가에 집을 짓고 홀로 생활한다. 그 생활의 기록이 이 책 "월든"이다.


그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책에 자세히 나온다.


소로는 실제로 자신이 살집을 제손으로 졌다. 오두막이라 불리는 이집을 짓는데 28달러 12.5센트가 들었단다. 이 집값은 그 당시의 일년치 집값과 맞먹는 액수라는 것이다. 요즘 28달러 가지면 무얼 할수 있나? 소로의 집에 쓰였을 나무 판자 1판 정도 살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쨋든 소로는 자신에 맞는 전연 사치하지 않는 집을 저렴하게 짓는다. 온 정성을 들여서.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다 마무리를 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연구가이며 실천자이다.


"나는 때때로 이 세상에서 타인의 도움을 빌리려고 하면 일을 가능한 한 단순하고 정직하게 처리하기가 완전히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질 때가 있다."


그는 타인의 시선이나 관습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 되도록이면 무시한다. 그에게는 야성의 힘이 있다. 새벽일찍 일어나고, 추운 겨울에도 밖에 자주 나간다. 언 호수의 물을 관찰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그 방면의 전문학자 같다. 얼음이 어는 속도와 지역마다 다른 깊이, 그리고 기포의 모양까지 그런 것을 일일이 조사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연의 성질을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그의 애정을 보면 기가 막힌다. 호수뿐인가? 집앞에 출몰하는 동물들, 새들, 곤충들 그런 것들도 그와 쉽게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 묘사는 사람을 그린 분량만큼 비중있게 다뤄진다.


그옆에 있는 나를 상상하면 정말 보잘것 없어 보인다. 자연의 풍성함을 즐기지만 나무 한뿌리 풀 한포기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그를 향유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반성이 된다.


그는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을 만들어먹고, 가끔 낚시해서 물고기를 먹고 산에서 나는 열매등을 먹었다. 그는 집이 없어서라기 보다, 자신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월든 호수"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고자 한 것 같다.


그는 오두막에서 살지만 많은 시간 밖에서 보낸다. 아주 추운 겨울에도 밖에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호수와 그를 둘러싼 생태계를 관찰하는 것이 거의 생태학자 수준이다.


"호수는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의 요소, 즉 대지의 눈이다. 그 안을 들여다보는 자는 자기 본성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물가에 서 있는 나무들은 눈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속눈썹이며 숲으로 덮인 주위의 언덕과 절벽은 눈 위에 그려진 잘 생긴 눈썹이다." (p262)

 

"봄이 돌아오면 싹이 부풀어오르듯이 시기가 되면 호수는 기꺼이 그 법칙에 따라 소리를 울리는 것이다. 대지는 구석구석 살아있는 작은 유두 모양의 돌기로 덮여있다. 큰 호수도 막대 속의 수은 알갱이와 마찬가지로 대기의 변화에 극히 민감한 것이다"  (p421)


그는 가끔 사람을 보러 마을로 나갈때, 마치 다람쥐를 찾아 숲속으로 나가는 것같은 마음으로 간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제 6장 "방문자들"을 보면 그의 또다른 면을 알수 있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깊이 교제한다.


"내 오두막에는 의자가 세 개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서, 또 하나는 우정을 위해서, 세번째는 교제를 위해 준비한 자리이다. 방문객들이 뜻밖에 많이 찾아올 때면 이 세번째 의자까지만 내놓을 수 있기 때문에 쩔쩔매야 했지만, 모두들 선 채로 좁은 장소를 잘 이용해 주었다. .... 한 지붕 아래에 육체를 갖춘 인간이 한꺼번에 스물 다섯명이나 서른명이나 들이닥친 적도 있었는데 그래도 서로 그렇게 빽빽하게 끼어 있었다는 느낌도 없이 헤어지곤 했다."


하면서 그는 볼품없이 크기만 한 그 당시의 호화집들을 향해 "집이 너무 넓고 위풍당당한 탓에 그 안에 살고있는 사람은 집안에 작은 소굴을 이루고 사는 생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어쨋든 그의 특별한 곳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금식"을 했다고 한다. 그 옛날 그 많은 사람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겠거니와, "음식을 우습게“ 알던 소로에게는 그것이 가능했을 것 같다.


"그러나 스무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들이닥칠 때에는 설사 두 사람분의 빵이 있다 해도 식사 따위는 화제가 되지 않았고, 마치 먹는 습관을 버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금욕을 실행했다. 하지만 방문객들은 이런 접대를 결코 손님을 홀대한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사려깊은 접대로 여겼다."


소로는 초대받은 집의 상다리가 휘어지면 무척 부담스럽고, 다음에 다시 오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회고한다. 그와 똑같이 대접할 능력이 없는 그에게 당연했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건 "능력"의 유무를 떠나서, "음식의 가치"에 대한 다른 시각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다. 이 내용을 가지고 섣부른 토론을 시도했다가 대번에 "면박"을 당한 일이 있는데, 나는 아직도 "먹는 것이 모이는 것의 으뜸에 앉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이다.


요즘의 그런 태도는 자칫, 무례하고, 예의없고, 게으르며, 살림못하는 인간으로 몰릴 수도 있는데, 딱히 그런 오명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음식 대접 문화"가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을 앞서는 것중에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


내 딴에는 손님들을 위한 접대에 최선을 다한다.(누군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만). 냉장고, 냉동고가 있고, 네개의 불을 동시에 점화시킬수 있는 개스 레인즈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식품점이 널린 현대에서, 음식을 서운하게 대접하면 안될 것이다.


혹 “잘 안먹여 보낼 만큼 용기가 있다”면 그들이 “특별한 다른 접대”를 받았다고 느끼게 할만큼 주인의 카리스마가 뛰어나야 할텐데, 그건 무얼로 채우겠는가? 그러니, 이건 애당초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손님 접대가 단지 음식접대로 대치되는 것을 우려함인데, 어쨋거나  "음식문화"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논란거리가 되니 이쯤에서 접는 게 좋겠다.


이 책은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심한 노동"을 하며 "지혜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집필 한 것 같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살았으며 비용은 얼마나 들었고, 오두막에서의 생활은 고독이 아니라, 사색을 밝히는 귀한 시간이었다는 걸 주지시킨다. "노동"보다는 "사색"에 투자를 더하란 말이다.


지금까지 논거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지은이의 주장을 내식대로 표현해보자.


"사람들아. 너희는 너무 복잡하게 산다. 고기와 버터를 얻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며 일을 해야 하고, 살고있는 집의 집세를 물기 위해 세상에 예속되어 있다.


그럴 까닭이 없다. 단순하게 살아봐라. 너무 많이 먹지 말고, 값비싸게 사야 하는 것에 너무 목매달지 말아라. 이 세상은 먹기위해 노동만 하고 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아주 필요한 것만 걸치고, 실속있는 집을 내손으로 짓고, 낚시를 하거나 약간의 작물을 즐겁게 키우면서, 사색하면서 살아보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중의 작은 부분이다. 따져보니 겨우 28살의 청년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긴 하다.


말하자면 선행과 같은 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게다가 기묘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열심히 시도한 결과 내 체질에는 선행이 별로 맞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었다....(중략).. 부패한 선행에서 피어오르는 악취만큼 역겨운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이자 신의 부패이다. 누군가 나에게 선을 베풀려는 저의를 품고 집을 찾아온 걸 눈치챈다면 나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칠 것이다... (중략).. 박애는 충분히 가치를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미덕이다. 아니 오히려 박애는 상당히 과대평가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박애를 이런 식으로 과대평가한 것은 우리들의 이기심이다."


중간 중간 책을 인용한 것으로 이 사람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순 없을 것 같다. 인간 내면에 있는 솔직함을 끌어낸 것이어서 공감이 간다. 세상에서 유익하다 하고 고상하다 하는 것들을 그저 믿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가치있는 것을 찾아내려 했다는 말이다.


"사상을 잉태하는 일" "자연과 사려깊게 지내보는 일"을 권장한다. 그는 사치나 허영같은 것을 몸에 걸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것이 "사상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상이 찾아졌는가?


위에서 말한 몇가지 그의 사상을 내가 끄집어 냈지만, 내게는 그의 "사상찾기"가 그다지 신통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그의 부지런함, 검소함, 사려깊음, 노동성 등등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지라도, 스스로가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많은 철학자들중의 한명으로밖에 자리매김할 수 없게 한다.


그는 노자도, 공자도, 맹자도 인용하고 호메로스, 단테, 세익스피어의 작품들도 많이 인용한다.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읽지 않고 가벼운 소설같은 읽을 거리에 안주하는 는 그 당시의 "현대인"들을 우습게 여긴다. 그에게는 성경도 같은 의미로 읽힌 것 같다. 그래서 다른 고전을 인용하는 것처럼 자신의 서술내용에 적당하면 성경인용도 자주 한다.


내가 안타까왔던 것은 그가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점이다. 단지 이 한권의 책으로 그를 논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라는 한권의 양서를 읽고, 혹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우연히 그 속에 담긴 진리 덕분에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해버린다. 그런 다음 일생 동안 가벼운 읽을거리만 전전하며 재능을 낭비하고 마는 것이다."


꼭 나를 두고 하는 말같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 포함된 것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성경을 읽고 제대로 된 "죄"를 느꼈는지 그 부분에서 조금 걸린다.


소로는 불특정 다수의 “진리”에 목숨 거는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 젊은 시절에 나를 놀래킨 한 친구를 연상하게 한다. 어느 구석엔가 있을 “진리”를 찾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그가 지금은 어찌 살고 있을지, 조금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