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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언니의 폐경... 김훈

오늘 아침 인터넷 신문을 보니 "한국책 무겁다"라는 기사가 있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며, 인생의 어두움을 그린 그런 책이 많다"는 이야긴줄 알고 클릭했는데 단순히 책의 무게가 많이 나가서 책읽기를 기피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책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이유는 종이질 때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외국의 가벼운 책의 무게까지 소개하고 있었다.

 

한국의 기술이 독보적인 부분이 많지만, 특히 한국의 출판기술(인쇄, 디자인, 제본)은 타의주종을 불허한다. 더 보기좋고 값나가는 책을 만들다보니, 책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부정적인 면이 발생하게 된 것 같다. 이곳에는 "Paper Book"이라는 종류의 책이 있는데, 그야말로 갱지에 깨알같이 글씨가 배겨있고, 책을 읽다가 엎어놓으면 다시 몸을 들고 일어날 만큼 그렇게 가벼운 책이다. "책같지 않은 책"이란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언젠가 그런 책을 손에 잡고 읽게 됐는데 책의 무게가 가벼운 것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책을 손에 들고 보거나, 누워서 보거나, 들고다니거나 큰 부담없이 몸 가까이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책은 값어치가 떨어지는 듯한 것이 사실인데, 가벼우면서도 고급스런 그런 책을 만났다. 교재가 아니고, 가벼운 읽을 거리는 이 책을 본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일보 문예중앙에서 펴낸 2005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사실 책의 품질이나 종이질보다 중요한 것이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가 우선해야 하는데, 서론이 길게 된 것이, 이런 책이 주는 편안함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시멘트 바닥보다는 마루 바닥의 감촉이 더 좋은 것처럼 말이다.

 

책을 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가지 정도는 보장되어야 하는데, * 책을 뒤적여볼 시간적 여유 * 좋은 책이 섞여있을 만한 서점 규모 * 넉넉한 포켓 머니 등인데, 이 세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기가 힘든 이민생활이다.

 

어쨋든 작은 규모의 서점에서 짧은 시간안에 쌈짓돈을 아까와하며 고른책이 수상작 김훈의 "언니의 폐경"이 포함된 작품집이다. 김훈 외에 은희경, 윤대녕, 성석제, 하성란, 박민규, 김연수, 임철우, 구효서, 하성원의 단편이 실려있었다.

 

 

책 표지도 가벼웠다. 그래서 볼펜으로

잠시 눌러놓고 찍었다.

 

 

이런 작품집은 문단에 활약하는 작가들의 성향을 알수 있기도 하고, 잘하면 그 흐름까지 잡아낼 수 있어서 본전은 하는 책사기 방법으로 활용하곤 했다. 오늘 나는 김훈의 소설을 이야기 대상으로 삼고자 하지만, 박민규 작가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참 신선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우선 기본적인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두 자매가 있다. 한명은 회사중역의 부인인데, 그 중역이 비행기 사고로 죽는다. 그러고 나서 폐경이 급속도로 진행된다.

 

이 언니를 보는 화자인 "나" 역시 회사 중역(나중에는 대표이사에까지 오르는)의 부인이며, 딸을 유학보내고 남편에게 "이혼"제의를 받는다. 그녀는 남편과 언니의 도움을 받아서 작은 아파트를 구입한다. 그곳에 언니가 가끔 놀러오고, 새로 사귄 남자가 방문한다. 그 남자는 남편과 동기입사생인 회사직원이다. 그는 나중에 남편에 의해 해고당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남편으로부터 사별하고,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두 여자가 겪는 폐경기의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중 화자가 여자라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쓸 당시 50대 남자가 분명한 김훈 작가가 오히려 여성작가들이 간과할만한 미세한 감정들을 포착해냈다는 평을 받는다.

 

마지막 생리혈을 남편이 죽은 날 흘리는 "언니", 그 "언니"의 엉덩이에 패드를 대주는 또다른 상실감에 젖어있는 "나"는 무언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그 허무를 잘 그려냈다는 것이다. 그 독특한 "폐경"의 때를 모르는 독자들에겐 그의 묘사가 그럴듯하게 보인다. 아니 폐경의 때인 여성들에게도 "그런 폐경"을 맞는 여자들이 있나보다 고개를 주억거릴 수도 있겠다.

 

 

형부는 집에 올때마다 미나리와 멸치, 파래, 미역같은 바닷가의 해산물을 사가지고 왔다. 언니는 미나리에 갓을 넣고 담근 물김치와 꽈리고추를 넣고 조린 멸치볶음을 나에게도 보내주었다. 갓이 우러나와 언니의 물김치 국물은 엷은 자주색이었다. 소금기에 숨을 죽인 미나리는 부드러웠고 엽록소 속에 흙과 햇빛의 향기가 살아있었다.

 

-17쪽 중간-

 

이상과 같은 묘사를 보면 남성작가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여성적이고 섬세하다. 그야말로 작가는 여성, 남성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 처럼 보인다. 그가 어떤 것을 묘사해도 그럴수 있을 것같은 믿음이 인다.(굳이 한가지 집어내자면, 멸치볶음이 아니라 조림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 그것도 "..조린 멸치조림"이라는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볶음"을 썼다면 할말없다) 

 

갑자기 생리혈을 흘리는 언니의 팬티를 잘라내고 생리대를 받쳐주는 장면은, 굳이 팬티를 잘라내, 더욱 비참해질 필요가 있었나 그런 의문이 든다. 그리고 등뒤에 손이 돌아가지 않는(그것으로 추측해보면 군살이 붙은) 언니가 등뒤에 단추가 달린 브라우스를 자주 입는다는 것은 납득이 안된다. 아예 그런 옷이 하나도 없는 서민의 관점에밖에 서지 못해서 그런가? 작가는 중년여인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려는 듯하지만, 역시나 적절치 못한 묘사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이런 것은 소설의 작은 부분이겠지만 폐경기에 이른 여성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금 걱정이라는 말이다.

 

김훈 작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단편 "화장"이나 "언니의 폐경"에서 보면 50대 가정의 황폐화를 그렸다.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던 젊은 날을 지나서 폐경기에 이르면 스스로 "피처리" 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진다는 것이다. 사실 월경은 폐경기뿐 아니라, 젊어서는 젊어서대로, 예기치 않게 사고가 발생해서 여성들을 난감하게 하는 사안이다. 그를 남자 작가가 드러내주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는지. 

 

성공과 실패의 양극단에서 성공은 약한 자를 무너뜨리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도 갖고 싶은 걸 획득하는 "공격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게 화자의 남편 한전무를 대표한다. 그는 이런 궁상맞은 소설의 중간에 낄 여유도 마음도 없다. 그저 좋아하게된 젊은 여자와 새 살림을 차리면 된다. 집안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혼이 확실해질때까지는 부인을 집안행사에 동원하고, 딸은 유학을 보내놓는다. 입사동기였지만 능력이 떨어지며 쓸모가 없어진 장기근속 간부들을 가차없이 해고시키기도 한다.

 

화자인 "나"는 그런 남편에게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는다. 남편의 속옷에 붙어오는 여자의 긴 머리칼을 보며, 그의 외도를 눈치채고, 그의 요구에 순응한다. 그녀 역시 결혼을 지속시킬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냉철하면서 교양있는 여자가 되지만, 결국 속빈 강정임을 드러내게 된다. 그녀는 해고당하는 남편의 부하직원과 어떻게 얽혀서 잠자리를 같이 하는데, 그의 개인사에는 발을 들여놓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의 의미를 떠나서 어떤 동병상련같은 것으로 묶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남편과 별거중임에도 "시댁의 일에 협조"하며 유학가있는 딸의 안정을 헤치지 않기 위해 함구한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카락을 속옷에 붙여왔던 남편처럼 자신이 입은 스웨터의 분홍색 앙고라 털이 남자의 속옷에 붙어갔을 것을 걱정한다. 교양이 가득한 위선덩어리이다.

 

더욱 입맛이 쓴 것은 이 여인의 딸이다. 부모의 별거는 자신의 장래나 유학생활에 혼란을 준다며 결합을 종용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산분할은 7:3으로 이뤄지게 되는데 그러므로 학자금을 양 부모에게서 타내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한다. 그녀는 "그들의 삶"이 "나의 삶"을 헤치기 때문에 화를 낸다.

 

중역의 부인이었던 언니가 형부의 죽음으로부터 중심에서 밀려나 시린 가슴으로 폐경을 맞아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자소리를 말하곤 하는 것도 폐경이 지닌 한 모습이다. 이들의 폐경이 치명적으로 보이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은 그들의 생활 방식이다. 화자인 "나"가 그녀의 "언니"를 보며

 

언니의 삶은 사소하고 하잖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하잖은 것들이 늘 언니의 삶을 짓누르고 언니는 거기에 걸려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언니가 내 머플러에 붙은 앙고라 털을 떼어줄때 나는 그 하잖은 것들의 무게를 생각했다.

 

삶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 이런 "하찮은 것들"뿐이라는 지적에 모골이 송연하다. 혹 남자인 김훈이 보는 폐경기를 맞은 여성들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하찮은 것들, 그렇지만 그 무게 때문에 짓눌려 갈팡질팡 못하는 중년의 여성들을 깨우기 위해서? 혹은 확인시키기 위해서?

 

폐경기를 맞은 혹은 앞둔 여성들은 세상의 시선에 대해 어떤 대답을 준비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