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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앤과 떠나는 여행 (끝)

마릴라와 매튜가 고아를 받아들여 가족처럼 키우면서 맺어가는 인연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부모뿐 아니라 이모 고모도 없는 앤은 마릴라에게 “aunt”(이모 혹은 고모)라고 부를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그러나 마릴라는 혈연적인 관계가 아니니, 그럴수 없다며 그냥 “마릴라”라고 부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나중은 “이모, 고모”라는 형식적인 호칭보다 더한 사랑의 관계로 결속된다.

 

마릴라는 좀처럼 감정을 과하게 표현하는 법이 없다. 앤의 상상력에 찬물을 붓는 것도 그녀고,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이쁜 드레스나, 집안 장식같은 것에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지만, 그녀는 그야말로 담백하고 정갈한 여인이다.

 

저녁기도를 할줄 모르는 앤에게 매일 저녁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첫 시작으로 해서, 앤을 생활인으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평범한 인간관계속에 있어보지 못한 앤이 자신의 상상속에 빠져들때마다, 현실의 찬바람을 노상 일깨워주곤 한다.

 

마릴라와 앤은 그러고보면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그들이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마릴라는 적어도 “항상 정직하고, 선하면서, 올바른” 삶의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앤의 불같은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집에 얹혀 살게 되자마자 옆집 아줌마와 대판 싸우게 된다. 고아라고 안중에 두지 않고 그녀의 약점을 찌른 아줌마를 용서할수 없어서 서러움에 몸둘바를 몰라하는데, 마릴라는 앤에게 아줌마를 찾아가서 사과하라고 말한다. 이 사건뒤로 앤은 문제가 생길때마다 회피하지 않고, 직접 해결하면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나중은 항상 예기치 않은 선물같은 것이 기다리고 있었음은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이 되었다.

 

마릴라는 앤으로 인해서, 조금은 굳었던 마음들이 펴지면서, 앤이 좋아하는 예쁜 드레스를 손수 맞춰주게까지 되는 것을 보면, 서로간의 사랑이 사람의 근본까지 바꾸게 됨을 보여주게 되기도 한다.

 

아, 그리고 매튜…

 

“아이 돈 노”와 “웰…”
이 정도의 대화기술밖에 없는 그는 인생 자체를 아주 소박하고, 한편으로는 “멍청”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앤이 어려움에 처할때마다, 아주 짧은 말로 앤을 위로해주고, 길을 제시해주고, 사랑을 주는 것이 너무 감동스러웠다.

 

앤이 실제적인 연극의 기분에 빠져서 물에 뗏목을 타고 누웠다가 익사사고할뻔한 사건이 있었다. 앤이 그런 모든 일을 겪고, 자신의 로맨스 타령이 가져온 결과에 낙담하여, 로맨스를 거둔다고 말하자 매튜는

 

“Don’t give up all your romance, Anne” he whispered shyly, “a little of it a good thing –not too much of course – but keep a little of it. Anne, keep a little of it.”

 

“네 모든 낭만적인 것을 포기하지 마라” 그는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했다. “약간은 좋은 것이야-물론 너무 과하면 안되겠지만- 앤, 조금은 남겨둬라.약간 말이다.”

 

책의 마지막쯤을 한가한 시간 가게에서 읽게 됐는데, 마침 그 부분에 매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있었다.
농장에서 너무 일해서, 약해진 매튜에게 “매튜, 만약에 내가 남자였다면 밭일을 도와줄수 있었겠고, 그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라고 말하는 앤에게,
“앤, 나는 사내아이 12명보다 너, 한명, 작은 앤이 좋단다. 정말 자랑스럽단다.”라고 말한 그 다음날, 그동안 모든 돈을 넣어두었던 은행이 파산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약해진 심장에 충격을 받아 죽게 된 것이다.


정말 얼마나 슬픈지. 그렇게 조용한 사람, 그러면서도 앤에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최대한의 것을 준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속절없이 눈물이 나왔다. 그만 봐야겠다, 가게에서 이게 뭔 일인가 하면서 책을 덮었다가도, 손님이 오면 잽싸게 눈물을 훔치면서, 조금씩 더 읽어내려갔다.

 

그 시기가, 앤이 커버리고, 매튜는 죽고 마릴라는 늙어가는 세대교체가 시작되는 때였던 것 같다.
겨우 고등학교를 마친 앤은, 그 당시 제도로는 학교교사가 되게 되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정말 다 성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대학교 장학금까지 받고 진학을 꿈꾸던 앤은, 마릴라가 늙어서 실명의 위기에 처하고, “그린 게이블”을 관리할수가 없어서 집을 팔려고 하자, 결정을 내린다. 학교가기를 포기하고, 고향에 남아서 교사를 하면서 마릴라를 돕기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비전이 모두 포기된 것이 아니고, 혼자 공부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이제는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겨우 17살 즈음에..

 

그러면서 생각이 미친다.

큰 딸이 이제 만 14살이다. 고등학교1학년인데, 이 즈음에 아이들이 막 크는 것 같다.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의무적으로 해야해서,(4년간 40시간) 지난번에는 8학년들의 “피시 프라이” 저녁 행사에 나가서 음식을 만드는 것부터 서빙하는 것까지 9시간을 일하고 왔다.

점심도 먹지 않고 갔는데, 어찌나 걱정이 되는지.


저녁 6시경 일하는 곳에 찾아가 저녁을 먹으면서, 괜찮냐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의무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들을 감당할만 하게 됐나 보다 하고 스스로 놀랜다.
여기서는 12살까지는 어린이로 그 이후로는 십대로 불린다. 사회인이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나래뿐이 아니라, 여름에 캠프에 가보면, 고등학교 학생들이 캠퍼들을 돌보는 “카운슬러”로 활동하고 있다. 캠퍼들에겐 “카운슬러”들이 하늘같은 존재들이다. 한 캐빈에 열댓명 되는 아이들을 두명의 “카운슬러”들이 돌보면서, 아이들을 보살핀다. 우리 아이도 이제 그 대열에 들게 됐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나도 요즘은 아이들 위에 군림하다가, 어떤면에서는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아이들에게 의존할때도 많다.

 

큰딸은 나보고, 매달 한번씩 치솔을 갈아줘야 한다고 일러주기도 하고, 한번 쓴 수건을 내가 살짝 다시 개서 함께 포개놓으면 냄새를 맡아보고 모두 밑으로 내려놓는다. 절대로 안쓴다. 예전같으면 몇번 더 써도 된다고 고함을 쳤는데, 그 아이의 까닭스런 청결을 이유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어쨋든, 아이들은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을 열어주고 귀를 기울여줘야 한다.

 

이번에는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내 영어 단어실력이 짧기도 하지만, 좋은 문학작품이라 그렇다고 품평하기도 한다.

 

“bosom”이란 단어가 너무 예쁘다. 처음 들었다. “best friend”는 친한 친구를 지칭할때 많이 쓰이지만, 앤은 “보솜 프랜드”를 만날 수 있을까 걱정한다.
옆집에 사는 다이애나가 그녀의 보솜 프랜드가 되는데, 이는 가슴속 깊은 것까지 함께 나누는 절친한 친구를 뜻할때 쓰는 단어로 보인다.

 

그리고 “splendid”. 앤은 이렇게 빛나는 상황을 많이 만난다. 얼마나 훌륭한가 할때 쓰는 형용사이다..

 

이밖에도 앤의 독특한 억양의 대화법, 그렇지 않아요? 멋있지요? 아, 너무 낭만적이에요?  그 사람은 상상이 없어보여요? 등등..

 

그녀는 동정을 구할때는 “당신도 머리가 빨간 고아라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따지다가, 그녀가 마침내 많은 도전을 이겨내고, 단단하게 서게 되자, 동정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고, 그녀의 잠재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참 멋지다.

 

매튜와 마릴라는 처음 앤이 오게 된 그 첫번째 실수에 대해서 고마와하는데, 왜냐하면 앤이 없는 “그린 게이블”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연일 수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매튜가 하늘에 대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앤이 필요하신줄 알고 주셨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서, 정작 일꾼으로 쓸 고아를 고르려 했던 마릴라와 매튜가 가엾은 여아 고아를 거두면서 말로 할수 없는 축복이 된 것을 읽게 됨도 기쁜 일이었다.

 

앤과 하는 여행은 여기서 잠시 쉬어야겠다.
다음 책을 만날때까지.


혹은 그저 나도 상상으로 앤의 나머지 생애를 그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기도 한다.

 

어쨋든 안 읽은 두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 독후감을 받아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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