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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요

쫑파티까지, 미 동부 여행 결산하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은 두루두루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아줌마들에게 있어선 시시때때로  "남의 남편이 더 잘나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남의 가이드가 훨씬 멋져보인다"는 것은 이번 여행길에 알게 된 또하나의 사실이었다. 우리가 여행했던 같은 시각, 같은 호텔에는 캐나다에서 온 또다른 여행팀이 함께 묶었다. 전체 여행을 총괄한 같은 여행사인데 하나는 미국 동부 4박5일 코스였고, 하나는 뉴욕핵심 3박4일이었다.

 

두 가이드는 같은 회사 사람으로 서로 잘 알고있는 것 같았다.

 

사실 우리는 조금 가이드에게 실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나무"를 들먹여서 좀 안됐지만(목사님들도 주로 할머니 성도들을 대상으로 교인들을 웃기더니만, 나역시도 그렇다) 엄마는 그간의 여행 경험중 최악의 가이드를 만나신 듯했다.

 

 맨하턴 월가. 꽃 별, 달, 나무의 순서이다.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많았고, 가이드의 자상한 손길이 필요한 여행이었는데, 여행객을 배려해서 그들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데 좀 미숙함이 보이긴 했었다. 그래도 우리는 "나무"의 불평을 한편으로 흘려들으며, 오히려 타박을 주곤 했다. 주요 여행고객인 할머니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가이드들이 얼마나 노력했을지 할머니들의 뻔뻔함을 상상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호텔에서 만난 풍채좋은 또다른 가이드 미스터 "든든"씨는 아침식당을 찾는 우리들에게 안내를 해주기도 하고, 맨하턴 거리를 헤맬땐 갈방향을 알려주는등, 싹싹하셨다. 말하자면 그는 필요할때 우연잖게도 곁에 있었다.

 

"꽃"이 시들했던 그날, 뉴욕 사거리의 쓰레기통앞에는 꽃을 둘러싸고 물, 달, 풀이 나와서 꽃의 등을 두드리며 끌탕을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미스터 "든든"씨가 다가와서, "체한 것 같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차에서 가방을 내왔다. 그리곤 무언가를 오랫동안 찾는다. 그러더니, "토해야 한다"면서 그런 다음 진정되면 약을 먹으라고 약봉지를 하나 준다. 우리쪽 가이드가 휑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차에 올라선 다음이었다.

 

이전에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이날 자정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데, 이것 또한 선택사항이어서 원하는 이들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맨하턴에 남기로 했었다. 그리고 새벽 1시경 다시 그들을 데리러 온다는 계획이었다. 이러다보니, 호텔로 돌아갈 사람들은 모두 한차에 타고, 버스 한대는 이곳에 정차하는 방법을 생각했었나 보다. 물론 계획에 없는 내용이고, 두 가이드간에 합의된 사항이었겠지.

 

우리가 차에 올라서자, 우리 자리에 다른 한인이 앉아있다. 우리가 늦게 타자 그 자리가 빈 좌석인 줄 알고 앉으셨나 보다. 차안은 이런저런 일들로 맨하턴 거리보다 더 술렁이고 있었다.

 

"꽃"이 자리에 앉자, 미스터 "든든"씨가 자기팀에서 수소문해서 보낸 아줌마가 바늘을 들고 올라오신다. 엄지를 실로 묶고 바늘로 피를 뽑기 위해서다. 우리 가족들은 "꽃"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뒤 좌석에서 "아니, 이럴 수가 있어! 카운트다운을 위해서 돈도 지불했는데, 누구 마음대로 승객을 합치는 거야!! 한번 따져야겠네"

 

"물"이 그 와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니 조금만 참으시면 안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아줌마의 바늘땀으로도 시원하게 뚤리지 않는다.

 

어쨋든 이 일후에 가이드를 불러서 한 승객이 따진다. "양해없이 왜 마음대로 하냐"는 것이다. "도난" 사고라도 당하면 책임지겠냐고 톤을 높인다. 그랬더니 우리의 가이드 왈.... "제가 양해를 드릴려고 했는데, 세분이 늦게 오시는 바람에, 정신없이 지났습니다." 다시한번 우리 셋은 도마위에 올라가고..

 

어쨋든 두 가이드는 다시 의논, 본래대로 모든 승객을 제자리로 가게 하고, 버스는 호텔로 떠났다.

 

그밤에 있었던 일을 다쓰자면 또다시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날, 손따는 의사 역할을 했던 "물"이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나무"의 참견에 심한 비난을 해서, "나무"까지 토라졌던 일, 2007년이 가는지 오는지, 텔레비전에서는 타임스퀘어의 쇼와 카운트다운을 보여준다고 그랬었는데, 우리는 아무도 그런 것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 다음날 여행은 명품 매장에서 쇼핑하기와 보스턴으로 가서 예일대학교 하바드대학교등 미국의 명문대학을 탐방했다.

 

그러고보니, 사람들은 "명품" "명문"을 꽤나 좋아한다.

 

하바드 대학에 올 학생이 거진 전무해 보이는 가문이라 사실 우리는 그곳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하바드대학의 동상의 왼쪽발은 열심히 쓰다듬고 왔다. 동상의 왼쪽발을 만지면 3대안에는 하바드를 간다는 속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또 하바드에 떠도는 3대 거짓말의 하나라고 하니...

 

그리고 그날 저녁, 가이드가 쫑파티를 하겠다고 하였다. 미국독립전쟁을 일으킨 보스턴의 사무엘 아담스를 기념한 맥주가 무척 유명한데, 자신이 그것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흐음...

 

평지풍파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는 해도, 선생말을 잘듣는 모범과 학생들인 우리들은 당연히 쫑파티에 참여하기로 했다. 밤잠이 많은 "풀"을 제외하고는 "나무"까지 모두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풀"은 늙은 "나무"가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자리에 낀다고 눈살을 찌뿌렸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나무"만큼 모범생은 없었다.

 

각자의 사연들을 가진 열댓명의 사람들이 로비에 나타났다. 기러기 가족을 만나러 온 기러기 아빠들, 아이의 학교를 알아보러 뉴욕여행길에 나선 뱅쿠버 교민, 이민온지 6년차쯤 된 부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여행기간내 엄마의 수양딸이 된 미쉘양등.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별(왼쪽)과 꽃 포즈잡다.

 

 루레이동굴앞에서 별, 물, 풀이 기념촬영(왼쪽부터).

 

우리들의 온가족사진은 주로 미쉘양이 맡아주었다. 탱큐, 미쉘.

 

대가 센 딸들의 구박에도 의연한 우리집 "나무".

 

쫑파티에서 별, 물, 달. 

 

 

이날 대화중에 기억나는 것은 기러기 아빠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여기 사람들은 주말에 모두 집에서 뭣해요? 어떻게 나오는 사람이 없어요?"하는 것.

 

정말로 궁금해 못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특별히 남자들이 어떤 재미로 지내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느껴졌다.

 

"달"이 동포들을 대신해 들려준 대답은,,, "집에서 재미있게 지내는데. 아이들 스케줄따라서 왔다갔다하고, 또 가끔 친구들이 방문와서 놀고." 한인들이 많은 지역에서 사는 "별"은 조금 다른 각도로, "친구들과 한인식당같은 데서 많이 만나기도 하는데요.."

 

한국에 비하면 밖에서 노는 문화가 거의 전무한 것처럼 보이는 이곳 생활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이었다.

 

이에 대해 이민 6년차 아저씨의 대답이 명답이었다. 그는 "두 부류가 있어요. 심심한 것을 못견뎌서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사는  사람들, 그들에겐 이민생활이 어렵구요, 그런 것을 인정하고 가족간의 생활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은 그런대로 보람을 찾는"단다. 그러면서 "이민병, 외국병이 든 사람만 외국에 나와야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힘든 생활"이 될것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가이드의 마이크라도 빌어서 공개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달"은 "지난밤의 죄"에 대해서 무척 송구하다고, "여행객중에 한두명 사고칠 줄은 예상했어도 그것이 바로 우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날의 쫑파티는 10시30분에 시작 거의 12시 가까이 지속되었다. 가이드에 대한 서운함도 조금씩 풀리고, 한번 스친 인연들이지만, 얼마 동안은 기억에 있을 것 같다.

 

사실 가이드는 "나무"를 비롯, 우리 가족에게 최선을 다했다. 나중에 엄마께서는 "어떤 가이드는 입으로만 잘하는 반면, 이번 가이드는 전체적으로 많은 계획을 했었다"면서 일정표를 하나 더 요구하시기도 하셨다. 친구분들에게 보여주시겠다면서.

 

다음날 새벽 5시30분이 되면 모닝콜이 울려야 한다. 모닝콜이 울리지 않았다. 새벽잠이 없는 "풀"이 우리를 깨워 일어났다. 옆방을 두드리니, 아직도 자는 중이었다. "꽃"의 성화로 프론트에 알아보니 가이드가 모닝콜을 부탁하지 않았단다. 새벽기상에 모닝콜이 없으면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닌가?

 

가이드에게 전화했더니 "오 마이 갓!"한다. 그제서 잠이 깬 것이다. 그 시간이 6시 30분. 어쨋든 모닝콜은 그때서 모두에게 울려지고.... 그러게, 사람의 사정이 뒤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에게 빚을 갚았다.

 

마지막 날은 오로지 집으로 향하여 요이땅!이었다.

 

"나무"와 "풀"은 좌석확보를 위해 서두르신다. "나무"에게 할당된 경로석은 말이 그럴듯하지, 오히려 자리가 비좁아 "나무"가 좋아하지 않으셨다. 가이드의 마음씀이 고마와서 며칠 그 자리에 앉다가 그 자리를  버리고 신천지를 찾아나섰다.

 

그러기 위해선 아침일찍 버스에 올라야 하는 법. 그 일을 주로 "나무"와 "풀"이 맡으셨다. 가이드는 첫날, 서로 자리를 옮겨가며 앉으라고 주문했었는데, 먼저 맡는 사람이 그날 하루 같은 자리를 앉는 시스템으로 계속 유지됐다. 그러자니, 약간의 부작용들이 있긴 있었다.

 

마지막날 "나무"와 함께 앉게 됐다. 그날도 자리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마음을 먹고 대화를 시작했다.

 

여행 이야기를 꺼냈을때부터 "나무"는 여행사에 이야기해서 앞의 자리를 맡아달라고 말해보라고 주문했었다. 나는 우리가 좋은 자리를 맡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는데, 노인들과의 여행에서 항상 그런 우대를 받았던 "나무"는 그 부분을 조심스럽게 주장했었다. 그래서 한번 예약받는 이에게 부탁하긴 했다. 노인이 있어서 앞쪽으로 자리를 주었으면 한다고.

 

그런 부탁의 결과가 경로석의 한자리고(옆사람 동반), 그 경로석이 그다지 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 후로 우리들의 자리싸움은 눈에 안보이게 계속됐던 것이다.

 

"나무"는 "여행사에서 아예 예약순서대로 자리를 고정했으면 자리찾는데 그렇게 경각질(이게 맞는 말인지, 충청도 사투리인지, 서두른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소근거리신다.

 

나는 "그렇다면, 맨 뒤좌석, 좁은 데 앉는 사람은 여행 내내 그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니, 그것이 공평하달 수 있느냐?"며 딴지를 걸었다. 그리고 "자리에 연연해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니고, 몇몇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게 되기도 한다"고 은근히 비꼬았다.

 

이런 대화가 조금 더 계속되었는데, "나무"도 의견을 굽히지 않고 계속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는 "당신 딸들이 모두 뒤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것도 괜찮겠느냐?"고 위협적인 발언까지 했다. "나무"는 "그래도 할수없지..."하신다.

 

사실,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를 앉나 아무런 상관이 안된다. 그런데 다리아프고, 행동이 느린 우리집의 "나무" "풀" "물"의 입장에서 보면 뒷자리에 탔다가는 내리는데도, 꼴찌, 다시 타는 데도 꼴찌, 더 큰 일들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몸이 안따라주니, 그런 것들을 챙기게 된다는 것을 내가 간과한 면이 있다.

 

여행을 떠날때 "구경"보다도 "수다" 떨 기회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매일 강훈련에 마음놓고 6명이 한자리에 앉아서,(호텔방을 2개 빌렸었다) 그자리에 없는 가족들 "흉보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자매들이 모이면 그런 수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시끌시끌해지는 데 말이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말이지, 쓸만한 토론거리도 많이 하기도 한다.

 

여행 마지말날도 전체 쫑파티를 끝내고 나서, 2차를 하자고 사무엘 아담스 맥주를 얻어가지고 호텔방에 들어왔는데, 씽씽한 사람은 나 혼자, 모두 졸고 있다. 

 

마지막날 버스에서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쪽 나란히 세줄로 앉았는데, 뒤의 두 좌석에서 말하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렸다. 이야기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토를 달아가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잘 나가다가 드디어 "물"이 "풀"의 심사를 건드렸다.

 

"물"은 이번 여행에서 엘로우 카드를 몇번쯤 받았어야 했다. 언제나, 속을 찌르는 말을 사정보지 않고 말해서, 우리는 사실 시한폭탄과 함께 다닌 셈이었다.

 

"풀"이 "나를 더이상 화나게 하면 소리지른다"고 엄포한후 분위기는 살얼음처럼 냉냉해졌다.

 

아침 7시 30분 출발해서, 나이아가라 국경에서 이번에는 캐나다이민관이 꼬치꼬치 따지는 바람에 1시간 30분쯤 걸려서 통과하고, 토론토 갤러리아 백화점앞에 내리니 저녁 9시30분이다. "나무"를 제외하곤 "풀"의 집으로 모두 갔다. 우리를 마중나왔던 형부께서는 아내와 처제들을 위해서 밥을 지어놓으셨는데, 너무 질게 됐다고 혀를 차고 계셨다.

 

여행떠나기전에 언니집에서 머문것까지, 그리고 여행후에 하루 더 묵은 것까지 근 일주일간을 뒤엎어졌던 날들이었다. "풀"은 언제 풀어졌는지 기억에 없다. 집에 있는 잠옷을 던져주면서 누구든 좋아하면 입으라고, 우리는 온몸을 던져 떨어지는 잠옷을 줏어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야, 내 말만 듣구 그러면 워치겨. 팔십 엄마두 날아 댕겼는디.. 까닭하면 나 배신자 되건네... 너 말여 뭣이 중요한지를 몰르는 인간여. 수십년간 각자의 인생을 살다가 잠시 내 삶을 접고 서로 형제를 위하여 마음을 보태는 여행이었다. "

 

이건, 이번에 어린 세딸 때문에 동행하지 못한 막내동생의 변명에 염장을 찌르는 "물"의 멘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