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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아직도 멀다는데...

그는 어떤 사람인가?

 

결혼전에 유학생이었던 그는, 결혼한 후 학교를 그만두었다.
결혼하면 생활전선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와 나의 당연한 결론이었다.

 

영어가 서툰 한국서 온지 얼마안되는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는 가리지 않고, 주차장에서 기름넣는 것까지 했다.

캐나다의 혹독한 추위에 자동차 기름넣는 직업은 그중, 어려운 일이었을 게다.

 

그런 다음에는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지하상가에서 다른 사람의 복권가게 매니저도 했다. 그런 일들이 우리의 신혼초기에 있었던 일들이다.

 

그때쯤인가, 내가 있던 회사 간부의 도움으로 한인비지니스 협회에 취직해 그곳서 발행하는 신문만드는 일을 했다.
그 일이 그중 오래한 일이고, 그 직장을 나올때에는 표면적으로는 편집장이라는 감투도 달았었다.

 

그러는 사이사이, 그는 공부를 해왔다.
처음에는 컴퓨터학을 단과대학 야간을 다니면서 졸업했다. 나는 그가 컴퓨터업으로 직업을 옮겼다고 생각했다.

 

토론토에서 작은 한국서점을 경영하게 되면서 그 한편에 컴퓨터업을 부업으로 할 수 있게 만들었다. 90년대 초반, 컴퓨터 보급이 막 시작될때, 컴퓨터 학원처럼 학생을 모집, 교육도 시키고, 컴퓨터도 조립해주는 일들을 동생의 남편과 같이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겉만 번지르르하지, 생업에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그때쯤이든가, 남편이 한의학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나는 울퉁불퉁한 얼굴로, 컴퓨터를 시작했는데, 실력이 부족하면 조금 더 공부하더라도 컴퓨터쪽이어야지 않겠느냐고 항변했다. 일단 발을 들여놓은 것의 깊이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남편은 나의 동의를 얻지 못한채 한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토론토에서 공부하는 한의는 전문대학이 있지 않고, 중국에서 온 중의사이면서 교수인 사람이 설립한 학원같은 데 였다. 첫걸음의 그 길이 그 열매를 얻으려면 까마득히 멀어보였다.

 

어느날, 마음을 주던 선배와 전화했다. 남편이 생판 다른 것을 공부하려고 한다면서, 하루하루 살기가 빠듯한 이때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준다고. 그 언니는 전화말미에 나를 위로하기 위해선지 이렇게 말해줬다.
“무언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것”이라고.

 

그 사람의 삼촌이 이미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낯선 학문이 아니었지만, 어쨋든 나의 도움이 없이 외로운 공부를 해야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했다. 우리가 토론토에서 3시간이나 걸리는 시골에 가게를 사서 이주한뒤에도 한주에 한번씩 긴 강의를 들으러 토론토 나들이를 해야 했다. (이때부터는 나는 동조자(방관자)가 되어있었던 것 같다)

 

어느 겨울인가는 토론토로 시험을 보러가다가 새벽 살짝 언 얼음길에 미끄러져 차가 뒤집히는 사고도 당했다. 그날, 가까운 차대리점에서 차를 빌려서 시험보고, 도매상에서 물건구입하고, 깨진 안경까지 마춰 끼고 밤늦게 나타나서 사고났었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날 새벽 남편을 토론토로 보내놓고 나니, 늦게 외로운 공부를 시작한 그가 어쩐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 그가 불쌍합니다. 지켜주세요”하는 기도를 잠깐 드렸었다.

 

그 시간쯤에 그는 찻길에 미끄러졌지만, 사람은 온전했고, 경찰과 주변차들의 도움으로 차 사고를 신고하고, 차를 빌리기까지 해서 모든 일을 마치고 올라온 것이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본인이 산 것은 나의 기도때문이었나보다며 좋아했다.

 

침 공부를 마치고, 그는 그밖에도 원거리 통신으로 “약초학” 같은 것을 추가로 공부했고, 얼마전에는 대학에서 하는 “대체의학”  코스를 섭렵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가 생업을 하면서 동시에 할 수 있는 관련학문을 되는대로 이수했다는 말이다.

 

토론토 공부를 끝마치면서부터 비어있는 이층의 아파트에 “한의원”을 차렸다. 물론 거의 모든 환자가 이곳 서양인들이다.

 

소문도 조금씩 나고, 꾸준히 하지만 아직도 이 직업은 그의 부업 수준밖에는 안된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공부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학문을 서양에서 공부하려니, 깊이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면서 인터넷을 꾸준히 뒤지고, 한국에서 발간되는 한의학 서적을 기회되는 대로 사서 읽지만,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가 보다.

 

공부가 미흡하다고 느끼는 그 이면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한의사들에 관련된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한인을 상대로 하는 한의사들의 경우, 어디에서(한국이냐 어디냐) 얼마나(몇년간) 어떻게(어떤 교수진, 학교) 공부했느냐로 신경전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것들에 남편이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나는 “당신정도면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교수를 해도 된다”고 부추기는데, 그건 실상 그의 공부마음을 수그러뜨리기 위해서 그런다고 볼 수 있다.

 

나의 거짓칭찬에도 넘어가지 않더니 드디어는 중국한의과대학을 가고싶다고 한다. 중국에 가서 침연수를 받고자 했던 것은 그의 오래된 염원이었는데, 침연수를 넘어 5년 과정에 등록하여 원거리로 공부하고 일년에 한두차례씩 가서 집중연수를 받는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찾아냈는가 보다.

 

요즘 그와 나는 고민에 빠져있다.

 

오늘 아침에는 며칠전에 인터뷰한 그의 기사가 지역신문에 실렸다.
그야말로 이곳에서 한의업을 하는데는 그의 지식과 능력이면 될 것 같은데, 그는 미래를 내다보고, 미리 준비를 해야한다고 한다.

 


 

아큐펑춰리스트(Acupuncturist)는 침술사라는 뜻입니다. 남편이 인체모형을 들고 침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발 떨어져 멀리 회귀해서 보면, 그는 이제서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무슨 약속?
“나는 한의를 공부하고 싶어. 같이 중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그러자..”
결혼전에 펼쳐보였던 청사진이다.
그때에는 그런 말들이 그저 결혼하고 싶어서 그럴듯하게 자기를 포장하는 말로 들렸다. 그 말 이전에라도 나는 이미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내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지금의 그로 그저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근시안적이고, 현실안주형이라 해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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