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새동아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복지의 뜻이 이렇게 나와있다.
복지국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캐나다에서 살면서, 그 복지의 참맛을 며칠전에 알게 되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언니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소아마비로 앓은 것은 2살때부터였고, 지금 5십고개를 코앞에 두고 있다.
소아마비라는 장애는 일반인들과 매우 다른 삶의 형태를
그리게 되는 것 같다.
본격적인 돈벌이를 해본 적이 드물다. 특히 캐나다에 와서는 모두 안면있는 사람들로부터 그녀의 “신체조건”을 충분히 감안해서, 생각해서 일을 주고, 보수를 주었던 일들이었다. 어떤때는 그가 그저 자원으로 돈을 받지않고 일한 적도 있었다. 그 일의 성격이 돈을 받기에 적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배우자의 수입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조금 특별했던 경험은 한국에 있을때 시골에서 피아노교습소를 성공적으로 경영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온후 이곳서는 그 피아노 교습자격을 취득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그런지, 취미가 아니었는지 더이상의 미련없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16년전에 이민왔을때부터 주변의 아는 이들로부터 정부에 “장애자 연금”을 신청하라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 그러나, 사는 문제가 그다지 절박하지 않았고, 캐나다는 내 나라라기 보다는 남의 나라에서 땅만 빌려사는 것처럼 조금 멀게 생각되어선지, 그런 시도를 해볼 염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언니가 늦게 캐나다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나서는 우리 가족 모두가 그녀의 앞길이 훤하게 열릴줄로 알았었다. 그야말로 하나 있던 우리 가족의 밑천이었던 (언니가 피아노교습해서 마련한 것이라고 엄마가 누누히 강조하던) 집을 팔아서 한 공부인데, 장애자의 신분으로라도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그렇게 자력하기에 충분할 줄로 믿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모두가 맞닥뜨린 것은, 학력이 높아졌다고 해서, 언니의 장애가 고쳐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힘든 공부생활로 인해서인지, 나이가 들어가서인지 몸이 더 허약해져서 그야말로 일상생활조차 힘들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결혼하지 않은 언니에게는 혼자 살아내야할 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전에 내가 칼럼에 썼던 것처럼 언니가 우리집의 옆 아파트로 이사왔다. 그게 언니의 독립생활의 시작이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게 됐지만, 개척교회에다가 목회자도 아닌데, 사례비를 요구할 순 없었다. 언니는 사례비없이 감사함으로 교회일에 매달렸다.
이사오기 전부터 정부와 관계를 트기 시작했다. 장애자의 몸으로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느냐 하는 것이 첫번째 질문이었단다. 이 기관 저 기관에서 도움을 주었고, 그런 일자리는 없지만, 일을 해야 하는데 하지못하는 것을 이유로 해서 실업보험금같은 것을 받게 되었다. 그 보험금을 받으면서 장애연금을 신청하라는 것이 정부관계자의 조언이었다.
언니가 장애연금을 신청한 것이 한 2-3년전쯤이었다. 우리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언니의 증거자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의사의 소견서, 진단서, 복지사의 의견과 현재 재산이 없어야 하는등 각종 서류를 준비해서 관련부서에 보냈다. 건강진단서 등이 유효기간이 넘었다고 다시 작성해서 보내라는 등, 무척 까다로운 일들이 많았다. 건강은 내시경 검사같은 한번 하려면 대단한 고역을 치뤄야 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 불편한 몸으로 토론토를 오가며 그 일들을 해냈었다.
그런데, 장애연금을 결정하는 기관으로부터 “장애 부적격” 판정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일해서 먹고 살수 있는 몸의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언니가 그런 일들을 진행할때 나는 옆에서 “조금 벌고, 부족한 것은 가족들이 도와서 살면 안되는가” 하는 생각들을 했었다. 그런데 그 조금 번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우리 가게에서 언니가 일을 배워보도록 했다.
한 이틀 하더니, 온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면서, 못하겠다고 한다.
언니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여러 증상들 중 하나가, “다리가 아픈 것”으로 말미암아 “몸의 균형”에 문제가 생기면 숨쉬는 것부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가끔 쉑쉑거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전체적인 조화를 맞추느라고 그러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장애 부적격” 판정을 받은후 다시 항소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서류를 다시 준비해서 보내고, 항소작업을 하였다. 수입이 없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도와주는 변호사를 구하고, 약식재판을 받게 되었다.
변호사와, 본인, 그리고 “장애부적격” 판정을 내린 담당자(불참)와 판사(장애위원회의 위원장)가 참석하는 약식재판에 나와 남편이 증인으로 함께 했다. “히어링”이라고 불리는 이 약식재판은, “장애 부적격”판정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옆 동네 모텔의 회의실에서 열린 이 재판에서 우리는 언니에 대해서 증거했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면서 도와줘가면서 일을 시켰지만 그 일도 감당하지 못했고, 아픈 다리로 그동안 고생한 일들을 말해줬다.
그가,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내가 고용주라면 그런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족할만한 성과를 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장 쉽다고 할 수 있는 “편의점”의 일도 소화시키지 못하는데, 친척이나 가족들이 그녀의 생계를 염려해서 일을 준다면 모르지만, 일반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엄격해보이는 판사앞에서 재판을 끝내고, 그의 결정이 오기까지 마음을 끓였는데, 결국 첫번째의 “장애 부적격” 판정을 뒤집고 “장애자”임을 증명받게 됐다.
그 날 우리는 “언니의 장애자 판정을 위해서 축배를 들어야 하냐”며 농담했지만, 그건 언니의 앞날을 생각할 때 참 큰 일이었다.
며칠전, 언니와 함께 정부사무실을 찾아갔다. 모든 수속이 끝나서 언니에게 장애연금이 지급되니, 나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장애연금은 “장애연금을 신청했으며 그 관련서류가 증명되는 2년여전으로 소급”된다고 말했다. 그동안 “실업보험금”으로 타왔기 때문에(장애연금의 액수가 훨씬 높다) 그 차액을 한꺼번에 다 지급하고, 옷값, 음식값, 아파트값이 나오는데, 그건 알뜰한 언니가 편안히 한달을 보낼 수 있는 금액이 된다.
의사를 정기적으로 만나러 가야 하니, 가정의가 멀리 있어서 차타고 가야 하는 “기름값”, 차를 주차하고 의사를 만나야 하니 “주차비”, 어떤 땐 한끼를 사먹기도 해야 하니 “한끼 음식값”같은 것은 기본액수에다 증액해서 지급한다고 한다.
또한 “치과 무료이용카드” “앿값 무료이용 카드”를 보내줄 것이고, 마땅한 이유로 이사를 해야 하면 이사비용까지도 보조해준다고
했다.
언니에겐 해당사항이 없지만, 당뇨병자의 경우, 특별한 무당식품을 사먹어야 하니, 그에 따른 초과지출도 지급해주는등, 살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들에 대한 설명이 있다.
정부에서 연금을 주는 기본 조건은 연금수혜자가 개인재산이 없다는 전제이기 때문에 통장에는 항상 $5,000 미만으로 입금이 되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생명보험이나, 장의보험같은 것은 들어있어도 무방하다고 하니, 살기위해서 필요한 것에는 관대하고 그밖의 것은 용납이 안되는 것 같았다.
언니는 장애연금이 확정된 이후로 한인교회가 있는 오웬사운드로 집을 옮겼다. 작은 아파트를 빌렸고, 완벽한 독립을 이루었다.
연금에 관한 모든 설명을 듣고 우리 셋이 밖에 나오니, 마치 지옥과 천국을 모두 경험한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지옥”은 “재판” 할때까지의 그 과정이요, “천국”은 평생 살것을 물질적으로 보장받은 이날 이후부터 인 것 같앴다.
“그러니 세금을 많이 내야 해”하면서, 납세자의 신분인 남편이 말해서, “마치 자기가 언니에게 돈주는 것처럼 말하네”하면서 내가 꼬집자, 언니는 “사실 맞는 말이지, 모두가 열심히 일해서 나같은 사람 살게 하는데, 얼마나 감사하냐”고 맞장구쳐주었다.
우리는 납세자이기도 하지만, 여러면에서 언니처럼 정부의 도움도 받는다. 아이들을 위한 양육보조금도 그렇고, 막내처럼 인큐베이터에 1달 이상 머물러야 했던 그동안도 우리가 들인 돈이라곤 주차료뿐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이런 개념이 아마 복지국가의 모습인가 보다.
“언니, 몸 조신하게 써서 100살까지 살어.”
이 사회에서 물질적인 면으론 도움을 받는 사람이지만, 그 언니의 타고난 강직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깨끗함은 이 사회의 또다른 어두움의
등불일 거라고 확신하는 동생의 웃음섞인 아첨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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