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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속으로

다빈치 코드 그리고 장미의 이름

내가 처음 다빈치 코드라는 책에 대해 들었던 것은 작년 가을쯤, 한국에서 잠시 방문왔던 조카로부터였다.


“이모, 한국에서 요즘 유행하는 책중에 <다빈치 코드>라는 게 있는데요, 예수의 후손이 있다는 이야기를 추리소설식으로 쓴 거래요.”

 

그런 다음 한국의 대학동창이 우리들의 카페에 다빈치 코드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썼다. 그러면서, “외국에 있는 너희들은 영어로 읽겠지만” 하면서 심상하게 덧붙여놓았는데, 속으로 “영어는 무슨…” 하면서도 책에 대한 호기심이 자리잡기 시작했나 보다.

 

그 뒤로,  옆 마을의 친구가 그 책을 읽느라고 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오래전에 사두었던 것을 요즘 원서로 읽고 있는데, 예수의 생애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고 말했다.

 

그래, 기회있으면… 하면서 이번에는 나도 한번 영어로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책방에 가서 보니, 잘팔리는 책이라 그런지 한권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보여주는데, 책값이 꽤 비싸다. 이렇게 비싼 책 사놓고, 앞부분만 읽다가 포기하게 되면 돈이 아깝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주저함이 생겼다.

 

그러다가, 책을 구입한 것은 우리가 지난 겨울 미국여행중에 발이 묶였던 아틀란타 공항에서 였다. 미국돈 남은 것으로 지불하니, 캐나다돈보다 조금 더 싼값에 산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번 시도해보지.. 그렇게 결정했다.


자랑하건데, 450 페이지에 달하는 그 책을 다 읽었다. 해석이 안되는 부분도 있었고, 단어를 찾지 않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지만, 어쨋거나 줄거리는 꿰면서 다 읽어냈다는 데 뿌듯함을 느낀다.

 

사실, 책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지, 원서로 읽었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책이 흥미위주로 쓰여져서 아마도 읽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에는 골방에 숨어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서 정면으로 칼날을 들이대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런 불경스런 책을 읽어도 되나 하는 생각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는 그런 소재와, 소설기법을 두루 갖추었다.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비밀을 캐내려는 대화는 그 깊이를 알수 없게 펼쳐져가고, 주인공들의 퍼즐맞추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줄거리를 다 나열할수는 없으나, 살해된 박물관장의 딸과 하버드대학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 그리고 그들에게는 구원자처럼 비쳐졌던 레이 티빙경의 묻고 대답하며 드러내는 그들의 진실은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팩스로 보내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해 기록되어지고, 누군가에 의해서 성경으로 채택되는” 그런 과정을 겪은 인간들의 책이라는 말이다. 그 와중에 왜곡되어진 것이 예수와 결혼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과소평가되고, 제대로 기록되지 않고, 교회권력에 의해서 내몰아졌다는 것이다.

 

온건하고 신사적이며 박학다식한 로버트와 용감하면서 정의롭고 아름다운 소피를 내세움으로써 이런 결론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같이 동조하게 만든다.

 

이 책뿐이 아니다.

 

어제밤 읽기를 마친 <장미의 이름>도 역시 대단한 비 기독교 소설이다.


이 책을 안것도 대학 동창의 언급으로 그저 이름만을 알았는데, 어느날 토론토 한인서점에서 몇가지 책을 고르고, 값을 지불하려다 보니, 주인아저씨의 뒷통수에 장미의 이름이란 책이 꽂혀 있었다. 아담한 크기의 하드커버로 2권으로 되어있었는데, 이 책을 그저 “이름”만 보고 골랐다.

 

나는 이 책이 종교서적인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몰랐는데 이 책을 파시면서 그 주인아저씨는 “책에는 다 주인이 있다”면서 아주 싱글벙글 하면서 주시는데, 1질을 팔게 되어서 기쁘신가 보았다.

 

2권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은 한권당 1000페이지가 다 되는 대단한 양이다.
어떤 책들은 글자를 늘이고, 줄간격을 벌리고 두꺼운 종이를 써서 겨우 한권짜리 분량이나 될까한 것을 2권으로 묶기도 하니(칼의 노래가 그러했다) 비록 조금 작은 판형이지만, 알뜰하게  묶어낸 <열린책들> 책이 호감을 주었다.

 

책에 관한한 까다롭기도 하고, 불평도 많은데, 이는 책의 편집 부실은 책 내용과 저자까지 한자리 밑에 두게 하기도 하니, 나같은 독자들을 위해서 책을 만드는 사람은 정성을 다할 일이다.

 

어쨋거나, 이 책은 종교재판이 있었던 중세의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7일간에 걸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조사한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의 이야기를 그의 옆에서 보좌역할을 하던 아드소 수련사가 죽을때가 다 되어 기록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책을 보면 종교가 정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잔인한 화형식, 이교도들의 난잡한 종교활동, 교황청에 속해있는 권위있는 교회세력의 부패와 속물성…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살인사건의 배후조종자는 광신적이었던 늙은 장님 수도사인 호르헤 노인이었는데, 그와 윌리엄 수도사가 싸우는 장면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거의 들어있다.

 

윌리엄 수도사는 말을 타고 다니던 12세기경, 그 옛날에 자연과학을 믿고, 종교재판에 회의하고, 광신자들을 조롱하는 슈퍼 히어로로 나온다.

 

그 역시 <다빈치 코드>의 로버트 랭던처럼 만인에 의해 흠모받을 수 있는, 정의롭고 용기가 대단하며, 신사적이고 학식이 깊은, 그를 보고 그가 말한 것이 진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다.

 

호르헤도 죽고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수도원의 장서관과 수도원 온 건물이 불로 심판을 받은 다음에 윌리엄 수도사는 아드소 수련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르헤 영감의 얼굴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중략)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그는 영원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연과학, 기호학의 신봉자이지만, 이런 맥락의 표현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나는 기호의 진실을 의심한 적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것은 기호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호와 기호와의 관계이다.”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버려야할 연장같은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그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준다. 수도사임에도 말이다.

 

이 두 책은 묘하게도 비슷한 점이 있다. 살인사건을 통해서 교회의 치부를 밝힌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작가 댄 브라운과 움베르토 에코가 모두 기호학자라는 점이다.

 

내가 추측컨데, 기호학은 암호풀이등을 통해 묻혀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학문인가 싶다. <장미의 이름>의 등장인물들은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들이 많다.


1300년경의 문서와 각가지 유물로만 남은 이들을 소설속에 재등장시켰다. 기호학자들이 옛것을 뒤지면서, 다른 진실에 접근하게 되고, 그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낡은 문서같은 데서 소설적인 상상도 발동할테고.

 

어쨋든 그들이 암호를 풀어나가는 작업은 신비하고도, 흥미진진하지만, 사실상 범인인 나같은 사람은 전연 꿈도 꿀 수 없는 기발한 발상들이 즐비하다. 독자들의 기를 일단 죽여놓는 것이다.

 

나는 두 책을 우연처럼 읽었지만, 또 때가 되어서 읽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모르면서 귀닫고, 눈닫고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런 책들에 못지않게 요즈음 목사님이 직접 강의하는 <성막>은 또 하나의 세계이다. 매주 2시간씩, 성경을 가지고 시청각 자료로 죄와 죄의 사함과, 예수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

 

몇가지 종교 관련 전문서적도 읽게 되었다. 이런 모든 일들을 잘 받아들이려고 한다.

 

책 <다빈치 코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그 사이트의 게시판에는 기독인과 안티 기독인들이 벌이는 치졸하면서도 섬뜩한 설전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닉네임은 정말 별의별 것이 다 있었는데, 하나님, 예수, 나 예수, 악마, 천사, 기독교시러요, 말세, 성직자등이었다.

 

참으로 혼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십분 이해하는 맘이다. 오죽하면 종교이야기는 가까운 사이라도 하지말라는 말이 있을까?


그동안 눈감고 믿었던 것을 이제는 눈을 뜨고 믿고자 한다. 알아야 할 것이 있으면 공부하고, 깨보고, 말로 깨져보기도 하는 그런 기독인이 되고자 한다. 그런 날들을 위해 준비하자.

 

댓가를 치루지않고, 그 열매만 흠향하려 했던 데서 손을 깨끗이 씻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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