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셋을
키우는
그리고
딸많은
집안에서
자란
나에게
네명의
딸의
이야기가
나오는
<분노의
꼭대기>라고
번역할
수도
없고,
<분노의
끝>이라고
해야할지,
<분노의
저편>이라
해야할지…
어쨋든
분노에
관한
영화이다.
십대부터
칼리지
학생까지
딸
넷을
키우는
캐리는
아주
여성스럽고
가족에
헌신하며
더할
수
없는
좋은
엄마이다. 그러던
그녀에게
변화가
온다.
어느날
남편이
지갑을
가지고
사라진
것이다. 때맞춰
같은
회사에
비서로
근무하던
(약간의
염문이
있었을,,
영화에선
별로
언급되진
않지만) 스웨덴
출신
여자직원이
소리소문없이
제
나라로
돌아갔고, 캐리는
남편의
소비벽을
고치려고
신용카드와
통장을
압수한
것이
그
며칠전이었다. 캐리는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스웨덴
여자와
애정행각을
펼쳐
둘이
사라졌다고
단정해버린다.
그때부터
캐리의
분노는
여러가지
형태로
표출되는데, 술을
마시고, 자녀들에게
독설을
퍼붓고,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태리에게
옆집의
남자
데니가
접근해온다. 왕년의
야구
스타로
현재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디
제이로
일하는
그는, 아주
남자다운
여러가지를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건들거리면서도, 자상하고, 뻔뻔하면서도
깊게
생각해주고, 단순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은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남자이다. 그가
테리
주변을
돌면서
그녀의
상처로
인한
불똥을
다
받기도
하고, 정작에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와의
질긴
사랑싸움에
지치기도
한다.
그런데
캐리의
아이들이
참으로
특별하다.
원래가
개성껏
자란
아이들인지라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제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
공부를
하고, 댄스를
하고, 사랑을
하고, 요리를
하고, 또
기회가
있으면
웃을
준비가
되어있다…
아빠가
떠난후
아이들에게
신경써주지
못하는
엄마
대신
저녁을
딸들이
준비하는
모습이
자유스럽고
사랑스럽다.
혼자
사는
데니는
캐리에게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왜
당신
집을
좋아하는
지
알아? 당신집에가면
다른
냄새가
나. 어느
땐
음식냄새가
진동하기도
하고,,,
또
무언가
소란스럽지.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소음이
감지될때가
있어. 그게
우리집과
다른
점이야.”
그중에서도
셋째
에밀리는
엄마에게
아빠를
찾아서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아빠를
가장
이해하려고
하는
에밀리가
큰
병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캐리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지
못한다. 몇번의
시도를
하지만,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끝내
통화를
성사시키지
못한다.
딸들의
사랑행각에
방해를
놓기도
하고, 진로에
어깃장을
놓는
등
캐리의
행동이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둘째딸은
중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등
딸들도
심한
사랑병을
앓는다)모두들
그런
그녀를
이해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것이
좋아질
때쯤
집
뒤
숲속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산책
도중
발을
헛디뎌
실족사한
것으로
보이는
남자
시체를
구덩이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는
스웨덴으로
떠난
줄
알았던
캐리의
남편이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네
딸과
엄마는
모처럼
안식을
되찾는다. 그
자리에
데니가
엉덩이를
비비고
들어오고.
영화는
막내딸이
엄마를
보면서
작성한
레포트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그녀는
<사람들이
분노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그녀는
레포트에서
<내
엄마가
아니라면
나는
그녀의
따귀를
때리고
얼른
반대쪽으로
달아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내
엄마>라고
적고
있다.
캐리는
정말
좌충우돌, 술주정꾼에다
독설가에다, 감정기복이
심하며, 못말리는
아줌마로
나온다. 남편이
아무런
언질없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떠났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캐리는
교양적이려고
하지
않고, 솔직한
그대로를
연기하고
보이는데, 조앤
알렌이란
배우가
그를
잘
소화해낸
것
같다. 데니역에는
케빈
코스트너. 능글거린
것은
어쩌면
남자의
속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를
보면서
한다. 여자처럼
예민하다면, 어떻게
사랑이란
것이 이뤄지겠는가.
사람냄새나는
가족이
뜻하지
않게
겪었던
사고와, 그
사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시간들을
모자이크하면서
살아내야
했던
가족의
이야기에
두시간
정신없이
빠져있었다.
그러면서
옛
생각이
조금
났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장지에
묻을때는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는데, 그
다음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날
저녁
캐나다에
있던
큰언니를
빼고 9명의
자매들이
하얀
한복을
입고
안방에
앉아있었다.
잔치는
잔치였는데, 우리는
상을
당한
당사자들이라, 집안일은
모두
친척들이
알아서
해주고, 귀하게
모셔놓은
신부들처럼
한방에
우글거리고
모여앉아있으니
자꾸
웃음이
나왔었다.
얘, 네
옷고름이
그게
뭐냐
하면서
한
언니가
말하면
우리를
또
서로를
돌아보며
낄낄거리고..
치마
말기가
올라갔다고, 너는
머리를
그렇게
따니
이뻐
보인다고, 소근소근
대면서 웃었었다.
아빠잃은
슬픔을
생각한다면
가당키나
한
일이건만, 철없는
아이들처럼
서로의
옷고름을
다시
매주면서, 집안일을
거들던
친척들이
눈치
못채게
우리
자매끼리
눈웃음을
쳤던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빠의
상중에도
웃었던
것은
아빠가
남기고
가신
낙천적인
성격들
때문인
것
같다고
그렇게
우리끼리
결론을
내리기는
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보니, 아빠가
우리들에게
크게
한을
남겨놓지
않으셔서
그런
것
같았다.
엄마
모시고
잘
살아라. 그렇게
즐겁고
자유롭게, 그런
아빠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오늘
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아버지를
묻고, 세딸과(막내딸은
그런
그들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레포트를
쓰고
있다) 엄마는
어깨를
기대고
벤치에
앉아
웃음반
눈물반
그윽한
평안을
갖는다. 그
뒤에
데니(새아빠가
될지도
모르는..)가
있든지
없든지,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마음으로부터 한이 풀어져 내리는 것, 게다가 사랑을 보탤 또 한사람의 가족을 갖게 된 것은 테리의 행운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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