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달간 언니의 유방암 검사가 있었다. 초기에는 무슨 일이? 하면서 신경을 쓰지 않다가,
검사가 끝나지 않고 길어지면서, 우리 가족 모두는 단단한 염려에 잡혀있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언니의 일이기도 해서 나는 언니의 병원행에 동행하고는 했다.
검사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픈 생각에 마치 환자 자신이 쓴 일지같은 형식을 빌어서 기술했다.
그러나 내가 환자의 심정을 대변할 수는 없는 터, 본인의 속마음을 짚어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저 리포트의 형식이라는 점을 독자들이 숙지해주면 좋겠다.(글쓴이 주)
환자 : 만 52세 여자
유방암 진료 : 2007년 12월부터 오웬사운드, 토론토에서.
기타 : 미혼.
2007년 12월
검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의사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다. 가정의를 꾸준히 찾는 모범생이지만, 또한 의사 말을 무척 안듣는 나쁜 상담자였다. 말하자면 추천해주는 영양제를 제대로 복용하지 않았고, 부인과에 가서 검사 한번 하고나선, 다시는 안가겠다고 선언하였으며, 4년전에 유방암 X-Ray를 찍고, 재검사를 해보라는 말도 심각하게 듣지 않았었다. 그뒤로 유방암 검사를 해보라는 의사의 권고가 한번 더 있었다. "조기발견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면서 말이다.
가정의가 있는 토론토는 너무 멀고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하겠다고 말하여 의사에게 받은 Mammogram(유방암 엑스레이 검사) 페이퍼를 가방에 넣고 다닌지가 한 일년은 된 것 같다. 마음 한쪽이 개운하지 못하여 드디어 집에서 가까운 오웬사운드 병원에 가서 보고를 했더니 얼마후에 약속이 잡혔다고 오랜다.
이날, 가족력과 개인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긴 설문조사가 있고나서 exam과 매모그램 촬영이 이어졌다. 여기서 exam이라 함은 간호사가 손으로 검진하는 것을 말한다. 오랜 시간 찬찬히 살펴본 간호사는 "정상"으로 진단했다. 엑스레이 촬영은 그야말로 "기분나쁜" 경험이었다. 무표정의 엑스레이 여자 기사는 환자의 신음에는 아랑곳없이 환자를 험하게 다루며, 촬영을 진행했다.
얼마후에 병원측에서 편지가 왔다. 우선 "너무 놀라지 말라"는 말로 안심시킨 다음, 이런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라며 초음파(ultra sound)로 정밀검사를 받게 된다며 날짜를 명시했다.
왼쪽, Examiner가 진료한 것은 왼쪽, 오른쪽 정상으로 나와있고, 오른쪽 엑스레이 촬영기사가 검사한
것은 왼쪽 유방에 정상 표시를 했다가 지웠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 울트라사운드가 필요하다고 밑에 표시되어있다.
2008년 1월 3일
편지에 그렇게 써있어서 그랬는지, 초음파 검사에 대한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초음파 검사실로 들어갔는데, 무척이나 긴 시간이 걸린 듯싶다. 같은 부위를 몇번씩 문질러가며 컴퓨터에 나타난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제서야 내 가슴에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데 생각이 미친다.
나중에 보니, 내 케이스는 유방암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온타리오 유방암 진료 프로그램(Ontario Breast Screening Program)"으로 편입되어져 가정의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진행되고 있었다. 초음파 검사에서 왼쪽 가슴에 멍울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조직검사의 날짜가 잡혀졌다.
2008년 1월 17일
그날은 여러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약속된 날짜에 검사를 받으러 가니, 다음주에 잡혀있다며 받아주질 않는다. 무슨 착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바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병원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온 사람에게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돌아가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그만 동양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버티자, 병원측 간호사들은 당황한 듯 싶었고, 마침내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계획에 없던 환자니, 담당자들은 무척 고까왔을터, 그중에는 지난번 무표정한 얼굴로 환자를 험하게 다루었던 그 "몹쓸 엑스레이 촬영기사"도 끼어있었다.
그녀는 나의 어눌한 영어가 듣기 싫었는지, 아니면 골탕먹일 생각인지 "통역인을 구하지 않으면 진료를 할 수 없다"며 으름짱을 놓았다. 일단 검사실에 들어서니, 마음이 침착해진다. 그녀에게 제부가 영어를 하니, 그에게 전화를 걸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통화가 되자 그녀는 제부에게 오늘의 상황을 설명한다. 조직검사를 위해 부분마취를 해야하며, 결과는 2주후에 가정의에게 통고된다는 것.
통화가 끝난후 검사가 시작됐다. 조직검사로 직행해야 할듯한데, 다시 엑스-레이를 촬영하려고 한다. 대신 다른 촬영기사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 나는 매모그램 촬영을 이미 마쳤다. 오늘은 조직검사하는 날"이라고 했더니, 그녀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조직검사 하기 전에 모든 것을 재검사한후, 이상이 없으면 집에 돌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조직검사를 한단다.
어쨋든 "그럼 그렇지, 내 안에 뭐가 있을라구. 이상없으면 보내준댔지?"하며 희망이 다시 생긴다. 그런데 검사를 끝내고 결국 조직검사를 하게됐다. 부분마취를 하고 조직검사를 위한 바늘(Core Needle Aspiration)이 "탕" 소리가 나며 가슴에 투입됐고, 혹안의 세포가 뽑혀졌다.
2008년 2월
조직검사 결과를 보기 위해 가는 길은 마음이 착찹했다. 가정의는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암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치 않다. 다만 가슴안에 혹이 있으니 일단 적출해서 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당신은 암이다"로 알아들었다. 기운이 빠져있으니, 의사가 "아직 암이 아닌데 왜 그러냐?"고 묻는다. "검사"하기 전까지는 아직 확실히 알수 없다"며 수술은 암에 권위가 있는 의사에게 받아야 한다며 전문의에게 의뢰해 놓겠단다.
엄마는 집에서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문제의 심각성을 못느끼시는 것 같다. 나는 "암"일수도 있으며 "죽을 수도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집에 돌아온 나도 그때서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병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피부적으로 느낀 것이다. 검사를 받는 동안, 만약에 암이라면 어떤 투병생활을 해야 하나, 조금씩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항암치료 대신 식이요법"으로 암과 싸우는 방법을 널리 전하고 있는 사이트의 글들을 조금 더 신경쓰며 들여다보았다. 우선 암에 좋지 않다는 우유, 치즈를 버리고, 생활습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컴퓨터에 빠져있었던 몇달 동안이 참으로 형편없게 생각되어졌다.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최소단위로 움직이고, 최근에 몇몇 사이트의 글을 독파하느라, 컴앞에 붙어있는 시간이 늘었으며 그에 비례하여 음식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돌봐주든지, 참견받든지 할 가족이 곁에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으리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든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간 부족함이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특히 최근 몇년간 작은 도시 오웬사운드에서의 삶은 아주 흡족했다. 장애연금이 나오고, 교회에서 봉사한 약간의 돈으로 내 한몸 건사하기는 수월했다. 또한 혼자 살기에 넉넉한 작은 아파트.. 가끔씩 찾아오는 교회친구들과의 만남 등 말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생활도 사실 어떻게 보면 지리하다. 10년후에도 20년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아니 내 말은 변화를 바란다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단 것이지.
그래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죽음을 가만 들여다 보자.
암임이 밝혀지면 현대의학을 거부하고 자연요법으로 치유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치유는 될 것인가? 병이 깊어지면, 죽음으로 가는 내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나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사고"로 죽는 죽음은 어떤가? 늙음으로 비참하게 "운신못하다가" 말라죽는다든지, 어떤 죽음도 할만하게 보이지 않는다.
죽어도 좋다고 잠깐 생각하다가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오니 사람이 살아날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조직검사후부터 습관에 신경썼다. 소식하고, 운동하고, 좋은 음식 먹고...
2008년 2월
암전문의를 만났다.
그는 그동안의 모든 검사 결과를 가지고, 병을 언도하는 "판사"와 같았다. 이때부터는 가족 모두가 걱정하기 시작했고, "연약한" 나를 위해 동생 부부와 또하나의 여동생이 동행했다. 전문의는 사람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혹이 있으나, 자신이 볼때는 암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것을 떼어내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가정의의 의뢰에 전문의가 응한 것으로 판단된다.
"암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듣고 동생부부는 얼굴이 확 펴진다. 그러나 수술을 해보자는 데야. 혹을 제거하는 수술은 전신마취가 필요한 외과수술(Surgical Biopsy)의 하나인 와이어 바이옵시 (Wire Biopsy)를 하게 된단다. 혹이 있는 부분에 바늘을 이용해 줄을 집어넣는다. 수술시 이 줄은 제거되며 혹(Lump)은 적취되어 조직검사를 하게 된다.
이 수술을 위해선 수술전에 한번 병원을 방문해야 했다. 반나절 이상이 걸려 마취에 관한 교육과 조사, 심전도 테스트를 받았고, 수술시 필요한 사항을 주입받았다. 그리고 반드시 보호자를 대동하고 와야한단다.
2008년 3월
수술전에 많은 시간을 들여 수술날 당일은 금방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 8시 수술약속이 되어있는데, 저녁 6시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니, 총 10시간이 걸린 셈이다. 수술전에 엑스레이, 손으로 하는 exam, 초음파검사를 다시 다 했고, 수술을 위한 와이어를 꽂았다. 그래도 그렇지 중간중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많았고, 수술실에는 2시 30분경 들어갔다. 수술하기 전에 마취해서 나는 의사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수술후 3-4시간 후에는 집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수술후에 신경이 날카로와진 것을 느꼈을뿐 대강 참을 만했다.
2008년 4월
사실, 이번 검사 기간을 통하여 가족들에겐 모두 알렸지만 주변인들에겐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다. 알리더라도 병이 확실히 밝혀진 다음, 그때 가서 알릴 것인지를 결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의 애정어린 관심 때문에 나의 이런 바램이 유지되지 못했다. 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말이다.
결혼을 하지않고 50평생을 살아온 내가 죽는다면, 누구에게 뒷일을 부탁해야 할까? 가장 가깝게 사는 동생이 있지만, 그애가 나보다 일찍 죽으면 어떻하나? 그리고 그애는 제 식구들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게는 "교회"가 피붙이같다.
성경공부에 모인 사람들과 죽음후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죽고나면, 내 통장이 들어있는 은행은 어떻게 내 죽음을 알게될까? 그리고 보험회사는 어떻고? 내 물건들은 누가 갖고, 누가 정리해주나? 그런 걱정들을 했더니, "전도사님이 무슨 돈이 많아서 그런 걱정을 하냐"고들 놀려서 한참 웃었다. 그러나 죽음후 단돈 몇푼이라도 그것이 걱정이 된다. 말이 나온 김에 몇년전에 들어놓았던 생명보험 이야기를 하게 됐다. 매달 아주 작은 돈을 치르면서 보험을 들었는데, 장례비용으로 쓰이게 되길 원해서 였다. 그곳의 수혜자를 "교회"로 하였다.
그 일을 털어놓고 "돈이 남으면 교회 헌금으로 하시고.."했더니, 한 성도가 "돈이 부족하면 어떻하냐"고 말해서 모두가 웃었다. 궤짝에 넣어야겠네 하면서 말이다.
동생에게 말했더니, 가족이 있는데 교회에 부담을 주었느냐고 한다. 다른 가족들이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겠다면서. 교회가 없어지거나, 하면 또 어떡하느냔다. 어쨋거나, 나는 상관없다. 내 마음이 그렇게 원해서 한 것을. 그러면서, 장례는 교회가 맡아해주고, 물건정리는 남은 가족들이 해주면 되겠다고 동생에게 말했으니, 알아서 해주겠지.
어쨋든 죽음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죽음 이전에 투병에 대한 계획도 조금씩 정돈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되도록이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 말하자면 사람들과 만나서 지금처럼 된장끓여 같이 점심도 먹고, 성경공부도 하고, 가족들 방문도 하면서... 나혼자는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으로 투병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하는 그런 투병생활은 내게 "은혜"가 될 것 같다. 아니, 간절하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살아야 한다던 나의 모토가 큰 변환을 겪게 된 것 같다. 이왕이면 소란스럽지 않게 투병하고 싶은...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자, 이제, 나올 이야기는 다 나왔다.
조직검사 결과를 보러 동생과 함께 갔다. 큰 검사가 있는 날도 아니니, 혼자 갈수도 있었지만, 만약의 결과에 내가 실신이라도 할까봐, 동생이 따라나서겠다고 해서, 함께 갔다. 사실 혼자갈 용기가 생기지는 않았다.
결과는 아주 간단히 몇초만에 끝났다. 의사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아주 깨끗합니다. 정상입니다. 1년후에 약속을 미리하고 한번 더 정기검진을 받으러 오세요" 이렇게 말했다. 몇달간을 끌어왔던 유방암 검사가 끝난 것이다.
홀가분하다. 여러 사람 걱정시켰다. 그러나 내게 큰 교훈이 되었다. 병이 걸렸나 의심하던 그때, 마음이 침착해지면서, 내게서 해로운 것을 배제시키던 그 모습은 "인간으로써 내가 썩 괜찮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 준비를 하던 사람이 정부에서 지금보다 넓은 새로운 아파트를 준다니, 그 아파트에 이사갈 생각을 하면 새로운 삶의 의지가 용솟음친다. 인간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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