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병이야.
왜 당신에 대한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처음부터..”라는 낱말이 떠오르는 걸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닥을 잡아나가기 어려워하는 성격 때문일텐데.
성격 하니 또 꼬리가 잡히네. 모든 일에 순서를 멕이고 일관성을 줘야 하는 내 성격 때문에 당신이 답답해 한다는 것 말이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많지만, 오늘은 그 면에만 집중하려고 해.
당신이 공부해온 것.
그러면 그 시작은 어디일까? 결혼하기 전, 어느 자리에선가 그랬어. 아마도 우리가 처음 다니던 교회의 다과시간이었던 것 같아.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홍목사님의 출판기념회 자리였던 것도 같고. 당신이 내게 그랬었지. 나는 한의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그래서 중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때 함께 가자고.
나는 정말로 그 말을 귓등으로 흘러들었었어. 시작도 하지 않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고, 그래서 중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데, 어쩌면 별볼일없는 현재에 조금 빛을 주기 위해서 말하는 청사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했나봐. 나는 당신이 한의학 공부를 한다고 해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이라서 그건 내게 아무 문제가 아니었던 거지.
그게 벌써 18년전이구나.
우리는 일단 신혼살림을 하기에 바빴지. 한의학은 물건너간지 오래고, 먹고사는 일에 매달렸어. 토론토대학 유학생이었던 당신은 학교도 그만두었지. 주유소 기름넣기부터 시작해서 가게 점원등을 했던 것 같구먼. 벌써 기억이 가물거리려고 해. 어쨋든 그러다가 센테니얼 칼리지에서 컴퓨터 스타디스(Computer Studies)를 수강했지. 과정이수 졸업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나네. 나는 당신의 전공이 컴퓨터로 바뀌었다고 생각했어. 도서대여점을 하면서, 한편에다 컴퓨터 학원을 열었었잖아. 90년대 중반, 컴퓨터가 무섭게 보급될 때였지. 그러나 우리 학원은 그런 호황을 누리진 않았었고, 영세함을 면치 못했었지.
서점이 내리막길을 달릴때쯤이었나봐. 당신이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했던 것이. 나는 컴퓨터 공부를 했으니, 만약에 공부를 해야 한다면 컴퓨터 관련 공부를 해야한다고 주장했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새로운 학문을 하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 당신은 컴에선 더이상 비전이 없다고 이야기했었지. 나는 그 어려움을 내게 전화를 주었던 전에 다니던 직장 언니에게 하소연했어. 그랬더니 그 언니 왈 "무언가 하겠다는 데 말리지 마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런 요지였지.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당신이 하겠다는 공부, 시작하게 했던 것 같아.
그 당시 무척 어려웠어. 막내가 태어나면서 아이들은 셋으로 불어나고, 서점은 문닫기 일보직전이고, 당신이 받는 쥐꼬리로 그런 것들을 운영해나가기 어려웠었지. 어쨋든 당신은 화난 "가장"처럼 묵묵히 당신의 공부를 해나가기 시작했어. 중국인에 의해 토론토에 처음으로 한의과대학이 생겼고, 첫 한인학생이 석영창 삼촌이시지. 그뒤로 당신과 함께 공부한 분들이 계시고.
그러다가 페이슬리로 이사오게 됐지. 은행융자로 산 것이긴 해도, 내 가게를 갖게 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가게 물건을 마음대로 갖다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나는 경제적 부담같은 것에서 어느정도 벗어나게 됐던 것 같아. 그저 아이들 배불리 먹일 수 있고, 따뜻한 집이 있으면 됐었으니까. 당신의 공부는 페이슬리에 오면서 계속됐지.
당신이 매주 토요일 새벽 토론토로 떠나면 무척 걱정되었어. 어느날은 "불쌍한 사람.."이란 말이 저절로 나오는 거야. 말이 3시간이지, 홀로 졸음과 피곤을 참으며 달려가는 당신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당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던 그날" 사고가 났었지. 새벽 얼음길에 차가 전복되었었잖아. 그 사고를 당하고도, 토론토에 가서 안경을 맞춰쓰고, 공부까지 끝내고 돌아와서 내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장난인가 했어. 그날 어떤 과목의 첫시험날이었다고, 피묻은 셔츠를 입고 늦게 도착해서 시험을 마치고 왔노라고. 그때 주저앉았다면 오늘같은 날은 없었겠지.
사고의 후유증은 그후로 오래가더구만. 지금도 사고현장을 지나칠때, 가슴이 떨리지 않는지..
그렇게 어렵사리 공부를 마치고 페이슬리의 가게 건물 이층의 한 아파트에다 진료실을 열었어. 한인이 한명도 없는 이곳에 "한의(침)"라는 씨앗을 뿌렸던 거지. 우리의 생업으로서의 가게가 있었으니, 그다지 마음을 졸였던 것 같지는 않아. 지역 신문에서 인터뷰를 해서 게재해주고, 소문이 나고 해서 심심치 않게 환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지.
당신은 그후로도 Stratford College에서 제공하는 Natural Health Consultant(자연치료 요법사) 공부를 통신으로 마쳤고, 또 다른 것들을 모색하기 시작했어. 다시 토론토행이 시작되었지. 세네카 칼리지에서 Holistic Health(대체의학) 강의가 열린 거야. 그때 무척 좋아했었지. 어느날 당신을 쫓아서 토론토에 갔던 일이 생각나네. 당신이 공부할 동안 나는 토론토 엄마집에 머물다가 다시 만나서 함께 집에 왔지. 수업이 밤 10시에 끝나서 함께 돌아오는데, 12시 정도까지는 잘 참았는데 그 시간이 넘어가자 정말 인사불성으로 졸리더군. 당신의 밤길 운전에 도움이 될까 해서 따라갔었는데, 정말 민망한 일이었어. 그 날 이후로 당신의 매주 공부나들이가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알게 되었어.
한 공부가 끝나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매번 찾곤 했지. 내가 볼땐 그 교수님과의 조우는 당신의 한의학 인생에 큰 전기를 이뤘다고 봐. 사이버 아카데미 침코리아의 이병국 교수님. 8순의 나이에도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유창한 강의를 해주시는 그분 말이야. "전통요법 전수자 과정(총 1500시간)"의 주강사인 그 교수님, 나까지도 흥미롭게 들을 정도로 달변이고, 박학하신 분이더라. 한번은 정서하면서 듣고, 한번은 테입에 녹음하면서 듣고. 영어로 공부해서 흐릿하던 것이 선명하다며 시간만 나면 강의에 몰두하던 페이슬리 시절이 생각나네. 중국상해대학에서 있었던 인체해부학 실습에 침코리아의 주선으로 참가한 것도 큰 소득이었다고 말했었지.
당신의 공부는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것 같앴어. 그런데 당신은 언제나 중심을 치지 못하고 주변만 맴돈것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는 듯싶었어. 한국을 떠나와서 한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당신이 찾아서 할 수 있는 공부는 다했다고 추켜세우는 아내 앞에서 무언가 더 해야한다면서 중국의 한의과 대학 과정들을 살펴보기도 했고 미국대학들을 훑어보았지. 나는 학벌보다는 지난 10년간의 환자진료 경험이 더욱 중요하다면서, 안주하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어.
그런데 어느날 American Liberty University 한의과 대학 대학원 정보를 모두 알아낸 거야. 우리는 또한번 결정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야 했지.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격려자가 되지 못하고, 지금처럼 살자고 주장했지. 늦은 나이에 또다시 공부라는 큰 벽을 넘어야할 당신이 안되보이고, 놀 사람이 당신밖에 없는데, 나는 누구하고 놀아야 하나, 뭐 그런 것들 때문이었지. 또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는 거야. 물론 "돈" 걱정도 하긴 했지.
18년전의 약속을 지켜낸 당신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말리기에는 내가 역부족이었어. 당신은 무언가 마음에 뿌듯함을 줄 공식적인 "인정"을 추구하기로 했어. 그래서 석박사 통합과정을 이수하기로 결정한 거야. 미국과 캐나다의 한의대학 학제가 달라서, 캐나다에서 공부한 것을 모두 인정받을 수는 없었지만, 당신은 그동안 공부한 자료를 미국측에 보냈고, 학교 사정위원회의 심사가 있었지. 그간의 공부한 실적이 반영되어 석사과정을 다 이수할 필요는 없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싶어. 박사과정은 필수, 선택 36학점, 임상실습과 연구리포트 30학점, 논문 15학점 등 모두 81학점인데 ALU의 김교수와 연락하면서 과제를 모두 미루지 않고 제때에 제출하곤 했어.
그리곤 남은 것은 15학점의 졸업논문. 논문의 첫자가 쓰여지기까지 진통을 겪었다는 것, 캐나다의 겨울이 길지 않았다면 하기 힘들었다는 것 정도가 내가 보탤 말일까? 매일 새벽에 당신이 없어지기도 했고, 몇시에 잠자리에 들었는지, 내가 눈치못챌 때도 많았었다는 것도. 당신은 지금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걸 썼나보다"라고 말하지. 무언가 씌였다는 표현이 맞는 말일까? 그렇게 해서 당신의 논문 “Fibromyalgia와 Myofascial Pain Syndrome 치료의 동양의학적 고찰”이 탄생했지.
당신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정통 - 말하자면 한국의 한의과대학을 나오고 한의과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은- 은 아니지만, 당신이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에 초연해질수가 있을 거야.
당신의 학위취득이 알려지면, 페이슬리의 클리닉이 조금 더 유명세를 타겠지? 작년에 일층 가게 옆을 리모델해서 클리닉의 환경이 좋아졌는데, 이제 날개를 달았으니 승승장구하겠는걸? "아픈 사람 낫게 해주는 게 얼마나 좋아!!" 당신이 자주 입버릇처럼 말하지. 당신의 학위취득도 결국은 환자들에게 더욱 나은 치료를 해주기 위함이야. 당신이 박사냐, 아니냐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결혼 즈음부터 그 길을 걷고자 했고, 아이들과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면서 이 길을 걸어왔어. 말하자면 18년전의 약속을 최고로 성취한 것이 됐네. 미안해. 나는 그길에 도움이 되지 못했어. 이제는 당신의 의견에 겸손해질께.
그런데 박사학위 이상 뭘 또 해야하는 건 없지? 그렇지? 아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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