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기, 빨리 걷기, 뛰기, 빨리 걷기, 느리게 걷기 순으로 걷기운동을 한다.
좀더 세분하면, 느리게 10분, 빠르게 10분 걷고, 2분간 뛰고, 13분간 빠르게 걷고, 10분간 느리게 걸어서 마무리한다. 걸리는 시간은 45분, 총 2마일, 3.2km를 걷는다.
이웃들에게서 "러닝머신"이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수였기에 그를 장만한다는 건, 꿈도 꾸지 않았었다. 집 주위나 동네를 걸으면 되는 운동을 어떤 기구에서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되고 안되고는 관념속에서 생긴 것이지, 현실은 약간 달랐다. 역시나, 이럴때는 박의 추진력이 있게 된다. 떡하니, 큰 운동기구를 사들여놓은 것은 지난 연말이었다. 이제 하루걸러 한번씩은 운동을 한다. 산천초목을 보면서 할수 있는 아름다운 운동을 실내로 끌여들여온 것이 수 자신에게 미안하고 씁쓸하다.
기계엔 1번부터 10번까지의 속도맞추기가 있다. 2번에 맞추고 느리게 걷고 3번에 맞추면 빠른 걸음을 걸어야 뒤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4번에 놓으면 더이상 걷기로는 감당이 안된다. 두 발을 공중에 교대로 들어올리는 뛰기는 겨우 2분 정도를 소화한다. 현재의 몸의 상태를 여실히 알려준다. 20km를 기계에서 매일 뛴다는 사람들도 많던데, 그들이 불가사의하게 보인다.
2번 느리게 걸을때에는 "생각"이 가능하다. 들여쉬기 내쉬기를 4초 간격쯤으로 하게 된다.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입으로 불어낸다. 정확한 방법인지 아직 판단을 못했지만, 요가할때 하던 방식이다. 저녁 식탁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같잖은" 글쓰기의 주제를 무엇으로 할것인지, 여러가지 생각들이 오고간다. 3번 빠르게 걷기로 가면, 생각은 끊어졌다가 이어졌다가를 반복한다. 숨쉬기는 2초 간격으로 빨라진다. 이때쯤 겉옷 하나를 벗어 옆에 걸쳐놓는다.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제 4번으로 들어가면, 머리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다. 단지 기계 전면에 설치된 매순간 숫자가 바뀌는 디지털 시계를 뚫어지게 본다. 1분이 지나가면, 숨이 차기 시작한다. 다시 60초를 더 뛰어야 한다는 게 불가능하게도 느껴진다. 생각은 모두 날아가고, 오로지 뛴다는 생각밖에는 없다. 그 2분이 사실은 "운동"이라고 말할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2분을 넘기고 나면, 다시 3번으로 내려온다. 가쁜 호흡을 정리하고 다시 생각을 모아들인다. 그 생각은 짧게 부서지기도 하고, 어떤땐 줄거리가 잡히기도 한다. 마지막 10분간은 사실은 어기정거리고 걷는 수준이다. 굳이 기계에 올라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흘러내렸던 땀을 식히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45분쯤이 되면 전체 뛴 거리는 2마일에 근접해있다. 1분 30초 정도를 보너스로 하고나면, 2마일에 이른다. 그러면 기계를 스톱시키고 내려온다.
걷기의 후유증인지 머리가 조금 아팠다. 움직이지 않다가 뛰기까지 하니, 몸에서 반응을 하는 현상같기도 하다. 여러 날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공인 허약 체질"이 되가려고 하는 중이다. 이 허약함이 어디서 왔을까, 노상 수사하는 심정이 된다. 아이들 키우면서 20여년간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을까? 산다는 것이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정녕 틀린 말일까? 그런 것들이다. 만약 생활 때문에 움직이는 것만으로 부족했다면, 무언가 부가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시도와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걸 인정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조금 더 파고들어가보자. 먹는 것은 어떠했나? 나를 자책할 수 있을만한 것은 "떡뽁이"를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 밖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밖에서 먹는 음식의 80%는 떡뽁이였던 것 같다. 출판사 다니면서, 인쇄소, 디자인 사무소, 작가를 찾아다닐 때마다 밖에서 홀로 식사의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 동네 골목골목의 모든 떡뽁이 집을 섭렵했었다.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 오로지 고춧가루와 전분만 먹어서 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렸을때는 김칫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도 즐겼었다. 서울 유학시절 동안, 풍부하게 먹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떡뽁이 매니아들도 나와 같을진데, 그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울려줘야 하는 건 아닌지. 허약"이란 단어엔 뭔가 "창백"하고 "가녀린" 청순함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이 허약함의 미덕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로 "칙칙함"으로 알려진 내 얼굴빛은 그런 가녀린 창백함과는 거리가 있다. 슬프다.
뒤집어서 내가 정녕, "허약"한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져보자. 지난 여름 캐나다에 와서 오래 머물며 수와 지냈던 동생 미는 "언니, 가만보니까 힘쓰는 것이 할머니 수준이야. 하루 몇시간 나갔다오면, 나머지 시간은 늘어져서 보내고.." 이런 평가와 박과 아이들에게서 얻어들은 이야기로는 허약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수 자신은 아직도 그걸 인정할 수 없다. 가끔씩 복병이 있긴 하지만, "제때"에 할일이 생각나는 것이 "건강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달리기를 못하게 된 것은 세째 아이때의 제왕절개 때문인지 모른다. 뛸수 없다고 다 "허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뛰는 삶을 가져보고도 싶다. 그럴려면,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는 수밖에는 없다. 병약한자 입장에서는 수 정도만 해도 괜찮을 것이고, 하루 20km를 1시간에 주파하는 사람앞에서는 "허약"한 사람일수밖에 없다. 건강함의 수준대로 일렬종대로 세워놓으면 앞뒤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내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다. 그럴려면, 이왕 사놓은 기계가 닳도록 잘 이용할 일이다.
또하나 궁금한 것은 이렇게 걷는다고, "건강"을 손에 쥐게 될까? 일단 해보기나 하고, 그런 고민을 하라구 요 잡것아! 어디선지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