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는 어느땐 운동장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함을 닮았다. 먼데서 꺄르륵, 꺄르륵.. 그러다가 휘파람소리로 변하면 바람의 양이 조금 적어진 것이리라. 그런데,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사실 바람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바람소리는 무채색이어야 하는데, 아이들 소리는 유채색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아이들 노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먼데까지 실어날라진 것일수도 있다. 바람부는 날, 길을 걷다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몇번이고 고개를 돌리면서 드는 궁금증이다.
오늘도 바람이 불고, 또 예의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린다. 이건 바람소리는 아니야, 할만한 여름 운동장에서 떠드는 소리와 똑같은. 온천지가 눈으로 뒤덮인 동네 공원 야구장에 아이들이 모여있다. 잠바들을 입고, 모자를 쓰고, 그 눈밭에서 야구를 한다. 긴 겨울을 깨트리는 그들의 에너지에 눈보라속의 바람소리가 외려 왜소해보인다.
저런 때가 언제 있었을까?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취미가 줄어간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겠다. 눈밭에서 공을 던지고, 쳐내고 하는 그런 육체적인 몸놀림에서 다른 유희거리를 찾아내야 한다.
운동장만큼 큰 공간은 필요없다. 그저 마주보고 앉을만 하면, 이 찬겨울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만남의 장소를 물색하고, 때를 기다리고, 약속장소로 나오고, 이런 정도면 나이든 사람들에게 약간의 정신적 육체적 운동이 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즐거움을 부수적으로 얻는다. 오늘 이야기는 식당의 작은 한 룸에서 시작된다.
26일의 모임이다. 몇분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모임주선자는 좌석배치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어디에 착석을 하느냐가 처음의 문제였다. male(남성)끼리 female(여성)끼리 앉아야 한다는 게, 한 여성의 제안이었다. 장소가 협소했던 관계로 여자들이 안쪽에 앉는 것이 어떠냐고 했는데, 여자들이 바깥쪽에 앉아야 외부출입이 더 좋다고 한것은 여자1의 제안이었다. 그런후 그는 잠시 무대에서 사라졌다. 여자 4가 그렇게 하기를 제안했지만, 웅성웅성할뿐 자리가 잡히지 않는다.
이미 자리를 착석하신 분들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오른쪽에 여자들은 그 반대편에 앉았다. 말하자면 미팅 포지션으로. 여자1은 매일 보는 남자1과 마주앉고 싶지 않다고(그래서 사람들을 웃겼다) 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됐다. 남자는 2,3,4,1순으로 앉고 여자는 2,4,3,1 순으로 앉았다. 두팀은 자신의 짝앞에, 두팀은 좌석이 바뀌어 있었다. 내앞에 어떤 번호의 남자/여자가 앉느냐는 아무런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설레임의 시간들이 언제적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중 6명은 70대를 전후하고 있고, 한팀만이 50대에 바듯 들어섰으며, 임자들이 확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남자2는 최근 전립선 비대로 인한 레이져수술을 받았다. 전립선 수술후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오랜시간 앉아있거나 여행하거나 할수 없다. 그는 전립선 수술은 여자들이 아기 낳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 신체부위로 봐도 여자들의 자궁 부근이라며.. 산후조리하듯이 미역국을 많이 먹었단다. 매일같이 소변기를 채우는 핏물을 보면 얼마나 지독한 느낌이 드는지, 전립선 관련 병처럼 끔찍한 것도 없다 한다. 그런 말을 하는데도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 남자2의 장점이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희극과 비극을 잘 전한다. 전립선과 자궁을 비교하는 바람에, 그의 아픔의 강도가 전해지기도 했다.
오랫만의 만남에 남자4의 장발과 약간의 코수염에 리플들이 많았다. 예술가의 포스라든가, 중후해지고 부드러워진 것 같다든가 좋은 반응들이다. 그러자 여자 3이 남자1에게 말한다. 남자1이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렀던 것.... 그건 정말 "아니었다"고.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런 의견들을 쏟아냈다. 여자1은 "저사람은 머리는 하얗고, 콧수염은 까맣고, 또다시 턱은 하얗고.." 옆에서 견딜수 없었다 하였다. 그날의 남자1은 말끔히 면도를 했다. 남자1의 팬인 여자4는 남자1은 시간이 갈수록 젊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눈색은 더욱 맑아지고, 총명해지는 게 시험을 앞둔 수험생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남자1에게 손떨림 증세가 왔다 했다. 정종을 따르는 손이 약간 부자연스럽다. 한의사인 남자2는 척추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 아침저녁 붕어운동(손끝을 맞잡고 위로 올리고 배를 흔드는)를 하라고 제안한다. 현실을 깨우는 증세들이다. 누구 하나 육체를 늙게 하는 세월이라는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자1이 갑자기 묻는다. "한국사람들이 산을 좋아하는데, 무슨 산을 최고로 좋아하는지 알아요?" 모두가 생각에 빠질 찰라, 여자1이 "부동산"해서 모두가 빵하고 터졌다. 남자1은 여자1에게 가볍게 눈을 흘긴다. "그렇게 김을 뺄 수 있느냐"는 말이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모두들 "천생연분은 어디서나 다르다"고 말해준다. 여자1이 예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깔깔거린다. 남자1의 발언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즐거워죽겠다는 표정이다.
어쨋든 부동산 이야기가 나와서 남자3이 보탠다. 현재 미국의 집값이 싸서, 캐나다 동포들이 많이 투자하고 있는데, 많은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 플로리다같은 곳은 1백만달러짜리 집들을 4분의1 가격에 사기도 하는데, 관리비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세까지.. 만약에 세를 줘야한다면, 그 세를 관장할 사람에게 들어가는 돈부터 해서,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란다. 아무리 값이 헐어도 그 지역 사람들이 사지않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며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남자4가 거든다. 동네 백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가 플로리다 트레일러 하우스를 7천달러에 사서 좋아했는데, 쓰지않는 여름까지 에어콘을 틀어놓아야 했고(왜냐하면 습기에 곰팡이가 슬므로) 관리비와 세금등으로 비어있을 때조차도 돈을 엄청 들였고, 그를 처분하느라 고생한다며, 절대로 비슷한 실수를 하지말라고 당부했다는 말까지.
어쨋거나 겨울이 긴 캐나다 사람들은 따뜻한 남쪽나라를 좋아한다. 나이들면 일년중 절반 이상을 아리조나, 플로리다, 도미니칸 등등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가족관계에 집착이 강한 한국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하기 힘들 것이다. 내 손자 손녀가 있는 근방을 어떻게 쉽게 떠날 것인가? 괜히 투자라는 말에 속아 "싼것"을 넘보다가 허를 찌르는 수가 많은가 보다.
부부로 잘살기 위해서 남자는 귀머거리, 여자는 봉사가 되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여자는 보아도 못본척, 남자는 들어도 못들은 척.. 언젯적 이야길까, 여자4가 갸우뚱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재인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실수한다. 여자는 벙어리라고 했다가, 남자는 봉사라고 했다가. 여자 남자가 잘사는 방법이 이렇게 무언갈 심하게 훼손해야 했던 것이 옛날살이였다. 그래서 "한"들이 쌓인게다. 볼것 똑바로 보고, 들을 것 똑바로 듣고 해야 잘사는 것이라고 여자4는 정정해서 듣는다.
그래, 마치 핑퐁게임같았다. 한명이 던진 공(말)을 받아쳐낸다. 밑으로부터 쳐내진 공은 휑하니 띄워져 포물선으로 날아오기도 하고, 받기 어렵게 빠른공을 치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공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에 의해 쳐올려졌다. 나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그 시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모두가 편한 자세로 대했기 때문이리라.
자리가 무르익어 가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생일축하합니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서 작은 다과상에 차려진 생일 케잌. 한국식당답게 찰떡속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특별한 떡이 빙둘러있고 가운데 귤 위에 촛불 대신 짧게 타는 불꽃을 꼽았다. 남자2의 72번째 생일이다. 예전에 연예인이었다는 한국관 주인과 직원들이 함께 몰려와 노래를 불러주고 박수를 쳐주었다. 짧지만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스러졌다.
남자4는 남자2의 조카이다. 사람들은 삼촌을 위한 작은 자리를 만든 남자4를 격려하며, "자식보다도 조카"를 둬야겠다고 농담한다. 조카(그리고 그의 아내)는 삼촌의 수술에도 오지 않았었다. 겨우 3시간 걸리는 거리를 핑계하기에는 좀 미안하다. 어쩌다 때가 맞았을 뿐이다. 수술경과가 좋고, 생일도 다가와서 조촐하게 자리를 만들었다. 남자4가 가장 잘한 것은 마지막 축하 케잌 주문이 아니었나 싶다. 생일은 기억해주는 것이다.
우리들의 놀이는 "만남"의 놀이다. 오랜만에 만날수록, 서로를 그리워할수록 그 맛은 더욱 깊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이미 그 자체로 "만찬" 앞에 놓이는 기분이다. 눈밭에서 공을 직접 던지지 않아도, 식탁앞에서의 핑퐁게임과 같은 말놀이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질수 있다. 다만 한사람이 쳐낸 공이 돌아오기까지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자꾸 쳐내기만 한다면, 바닥에 떨어진 많은 공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재미는 반감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도구가 필요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그 경험을 들어줄 "귀"만 있으면 되는 얼마나 간편한 취미활동인가? 아 하 약간의 주전부리가 필요하긴 하다. 알코올보다는 따끈한 차를 나누면서 하는 이야기들은 훨 천진하고, 낭만스럽다.
눈보라가 심해졌다. 글을 쓰는 동안 잠시 자리를 떠났던 야구꾼들은 점심을 먹었는지 다시 돌아왔다.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야구장이 보인다. 오랜만의 아이들 등장에 눈을 잠시잠시 뺏긴다. 모두 눈사람이 되어서 눈밭을 뒹글고 있다. 이젠 눈폭풍이다. 이번 바람은 아이들의 소리까지 먹을 정도로 거세졌다. 아이들이 조금 걱정스럽다. 이제는 들어가거라. 젊음을 뽐내기엔 날이 너무 고약하다. 바람소리는 이제는 스테레오가 되어있다. 왼쪽귀와 오른쪽 귀를 울리는 소리가 다르다. 오늘은 그레이 부루스의 겨울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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