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자신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고, 모든 생각과 사건들을 공유한다고 느끼던 그녀로부터 배반감을 느끼던 그 당시의 일들을.
그건 수에게 꽤 큰 충격이었고, 인간관계의 방향을 나름대로 정리하는 데 공헌한 바가 크다.
그녀의 배반은 기실 본인 자신은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단지 수보다 더 마음이 가고, 생각이 가고, 애정이 가는 이른바 “남친”이 생긴 것일뿐이니.
그녀는 남친이 생기자 “수”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모든 초점이 오로지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가 있었다. 수는 그런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긴 했으나, 그녀의 배반이 내심 무척이나 서운했다. 어쩌면 그녀의 고민을 듣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으므로, 그녀의 고민을 받을 자격이 있다 믿었다. 그런식으로 수를 조금만 돌아보아줬다면, 수가 그리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 정도는 이해했을 테니까.
어쩌면 수는 그날 이후로 “사랑”을 경계하게 된다. 지나친 사랑은 주변인들에게 실망을 줄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하더라도, 그 사랑안으로 주변인들을 함께 끌어들이는 그런 식의 인간관계를 지향하게 된다.
그랬는데, 어찌 그렇게 되기만 했겠는가? 수에게도 빠져지내게 되는 사람들이 생긴다. 실망을 느끼는 주변인들이 있을 수 있다. 수는 특별히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어쩌면 수의 배반일 수도 있다. 그녀는 예고없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했는지도 모른다. 수가 어릴때 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충만해보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수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그랬기 때문에 수는 자연스럽게 그쪽 손을 놓아버린 폭이 되었다.
그녀와 참으로 많은 것들을 나누었다. 그녀의 장황하지만 솔직한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흥미로왔다. 다른 인간관계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로 빠져있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선언했다. 인생 후반전을 아주 색다르게 그리고 싶다고 했다. 수는 그녀의 결정에 어떤 면으로든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만나진 사람들과 삶을 나누느라, 집안 살림 걱정하느라, 언제나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를 오랫동안 건드리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공감대의 부족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나오기가 척박해진 땅이 된듯 느꼈었다.
스마트폰을 장만해도 처음엔 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인간사이의 소통에 100배의 배터리가 충전된 줄 알았는데, 그것이 금새 파바박하면서 타오르지 않는법이다. 내가 씨를 뿌려야 싹이 이곳저곳에서 올라온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딱 맞다. 물론 스마트폰 소통에는 우선 보내놓고 기다리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내가 볼때 그녀의 문제는 무엇인가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흘러들어왔다 흘러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내것으로 붙들고 씨름하는 그 무엇이 부족했다.
삶에 대한 안주가 또한 위험하다. 고립될 수 있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어쨋든 뚜벅뚜벅 걷기 때문이다. 걷는 길에서 낯선이도 만나고, 아는 이도 한두번 더 만나게 된다. 수와 소원해진 관계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녀에게는 수와 가졌던 교류만큼 빈공간이 생겼을 수 있다.
이건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관계는 변한다. 그럴때 그들에게서 배반감을 맛볼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풀어져있던 반대편 끈을 당겨봐야 할 것이다. 인간관계는 멀게 가깝게 언제나 유동적이란 말이다. 집착도 방임도 모두 경계해야 한다. 세게 흐를땐 같이 세차게 흐르고, 물살이 잔잔할땐 또 좀 느리게 흐르고. 그러고보니, 이것도 “기술”인 것 같다. 애인을 관리하는 것을 두고 "어장관리"라고 한다던가? 인간관계도 그런 어장관리인지도 모른다. 이쪽저쪽에 그물망을 쳐놓는다는 말이지. 자신이 주인공만 하는 인간관계도 있지만, 조연, 엑스트라로 족한 관계들도 있다. 그 모두가 다 필요한 것 아닐까?
인간은 인간 사이에서 길들여져야 한다. 나홀로의 시간들이 길어지면, 나중엔 잘 섞이지 못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재미도 없고, 흥미롭지도 않다.
제2의 인생을 선언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실망감에서 시작했더라도, 새로운 인생후반부의 시간들을 찾는데 성공하기를. 세상은 파면 팔수록 더욱 깊고 오묘하다. 인간적인 미를 지닌 사람들을 새로운 삶의 길에서 많이 만나게 되길 바란다. 사람을 좋아해보기를.
수가 그녀를 심심하게 두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수는 그리 재미있는 사람도 못된다. 그저 새로운 것을 추구할 그녀의 때가 된 것이라고 믿어보자. 그녀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그 길을 서두를 일 없이 잘 밟아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