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토요일 오후, 한통의 전화가 왔다. 수의 큰조카이다. 남자친구와 드라이브중인데, 이모네 와도 되냐는.
어쩌다 보니, 근방까지 오게 됐나보다.
전화를 끊고 마음이 바빠진다. 아침에 잠시 베큠한 것이 도움이 된다. 손님맞을 채비를 후다닥 끝내고 나니, 조카가 문밖에 서있다.
조카의 남자친구는 "브라운"이다. "화이트"는 백인, "옐로우"는 아시안, "블랙"은 흑인 그리고 그는 브라운..
브라운은 인도, 스리랑카, 네팔, 방글라데시 등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블랙보다는 밝고, 옐로우보다는 어두운 피부색깔을 지닌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흑인들과 한통속으로 볼수도 있다. "갈색"의 인종이 있다는 것을 내게 확인시켜 준 "브라운"이기도 하다. 조카의 남자친구는 게다가 비만에 가까운 "거구"의 몸이다. 한국사람들이 배우자감으로 브라운을 데려온다면, 십중팔구는 반대할 인상이다. 수도 오늘 처음 "브라운"과 약간의 대화를 나눴다. 가끔 가족행사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언제나 얼굴만 스칠뿐 말을 나눌 사이는 없었다.
사실, "브라운"이 오기전에 잠시 생각했다. 그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결혼하기까지는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다. 그가 회교국가인 방글라데시 출신이라선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은연중 조카와 그가 헤어짐의 수순을 밟았으면 싶기도 했다. 그에 대해 아무런 것도 모르면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은 종교적 이유와 선진국과 거리가 있는 그들 나라에 대한 편견도 한몫을 장식한다.
"브라운"은 평범한 청년이었다. 도시를 좋아한단다. 시골이 아름답지만, 이렇게 할일없는 곳에서는 살수 없을 거라 말한다. 시골에 오니, 사람들이 자신을 공포를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낄수가 있다고. 색깔있는 소수민족이긴 "브라운"이나 "옐로우"나 마찬가지지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대접받는 형태는 서로 달랐다. "브라운"은 "화이트"들이 본인들을 두려워하는 게 느껴진단다. "블랙"도 그런 대접을 받기는 마찬가지. "옐로우"는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동정도 받지만, "브라운"과 "블랙"들은 자신들(백인)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들로 본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서일런가. "브라운"은 도시의 다운타운의 삶을 지향한댄다. 도보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고, 유색인종이라고 주목을 받지 않는 그런 곳을 말이다. 시골살이가 유색인종에게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수가 사는 곳은 여전히 "백인"이 주류를 이룬다. 이곳으로 이주하고 몇해 동안은 어디서나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을 쳐다보는 것과 같은 그런 눈빛을. 시골살이 연륜이 쌓이다보니 조금 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에 무관하게 된 것인지, 얼굴도장을 많이 찍어놔서 유난히 눈에 띄는 시기는 지났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백인 위주의 마을이라, 흑인들은 언제나 눈에 띈다. "브라운"이 말한 차별을 "흑인"들은 매일 느끼며 살 것이다. 막내딸의 흑인친구 가족도 조만간 토론토로 이사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흑인들이 살기에 시골은 최악의 환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브라운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와서 그분의 연세를 여쭤봤다. 그랬더니, 여권에 찍힌 생일이 1950년이란다. 이야기를 더 파고 들어가니, 부모님 두분의 생일이 1950년 1월1일이며, 실제 생일은 모른다는 대답이다. 수는 "정부의 행정 때문이냐" 물었다. 호적과 실제 생일이 틀린 수도 그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아마 그럴거라면서 더욱 우스운 것은 두분 모두 실제 나이를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런 정도로만 알고 있단다. 브라운의 어머니는 현재 두바이에서 "교수"로 아버지는 건축업에 일하신다고 조카로 부터 들었다. 자식들이 있는 캐나다 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요즘 가족이 살집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브라운이 말한다.
저녁을 먹고가라는 수의 주문에 그들은 늦기 전에 간다고 한다. 토론토에서 3시간 걸려와서 1시간 30분 머물다가 다시 돌아가는 그들을 보는 마음이 짠하다.
"한국풍습으로는 손님들 배를 채워서 보내야 하는데.."
수의 말에 방문자는 말한다.
"우리 나라 풍습도 그래요. 접시가 비면, 주부는 열심히 음식을 채워주지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되었어요..하하"
그의 나라와 우리 나라의 풍습이 비슷하다는 것? 인간은 인종과 나라를 떠나 오십보 백보라는 말일까? 그러나, 한가지가 비슷하다고 그렇게 말할수야 없지, 다시 브라운을 저쪽 한구석으로 몰아내는 마음의 움직임이 바로 시작되는 걸 수는 주시한다.
도시에서 놀러온 방문객들에 대한 예의 차원이었을까? "도시"의 삶에 대해서 약간의 흠모함을 표시하였다.
"시간이 없을 때는 시골에 사는 것이 즐거웠거든. 아이들로 인해서 바쁘고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조금 홀가분해지니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시골생활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
"아이들이 다 떠나가서 그렇지요?"
"그런가봐. 한가해지니, 이제서 주위를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
"워커톤으로 옮기세요."
워커톤도 시골이긴 마찬가지, 나는 하하 웃는다.
"그런 다음에 워터루, 토론토로"
수와 두 도시 방문객이 웃는다. 그리고 이어서 시골살이의 심심함 때문에 마약이나, 술 문제가 불거진다는 다소 사회학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수는 시골살이를 우러러왔다. 누구에게나 시골살이를 권할 정도였는데, 요즘들어 "도시"의 삶이 가끔씩 떠오른다. 도시를 지향하던 사람들의 언어들도 합하여. 수는 이 징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건가? 모처럼 도시 방문객들을 맞으면서, "시골살이"에 배반하는 마음을 밖으로 표현했다.
수가 이렇게 된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동네 커뮤니티에 합류하지 못한 점이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옮겨온 이 마을에서 학교 자원봉사나 학부모 모임등, 이런 모든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새 마을로 이사오면서 예전에 사귄 인간관계까지 정리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수가 이민오기 전에 친구가 한말이 가끔 떠오른다.
"이민가면 하얀친구들 사귀겠네?"
하얀친구가 없다. 아주 최소한의 인연만을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됐다.
도시에 대한 흠모는 옮기면 더 나아질 무언가가 있을거야 하는 도피주의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은 도시타령을 할때가 아니다.
첫번째로 해야할 일이 동네 신문을 읽는 일이다. 1주일에 한번씩 발간되는 그 신문들을 읽고 동네 돌아가는 모습을 봐야겠다. 외국인 친구가 없어도 가능했던 삶은, 한국인 친구들과 조금은 더 가까와졌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이 먼땅에서 그렇게만 살다 간다면(어디로?) 그건 바른 삶이 아닐 것 같다. 나 아무도 필요하지 않아, 그랬던 마음에 흠집을 내야할 때가 왔다고 수는 생각한다.
'이공일이..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반감을 느꼈을때.. (0) | 2014.06.08 |
---|---|
어른들의 놀이방법 (0) | 2012.01.29 |
걷고, 잠시 뛰고 또 걷고.. (0) | 2012.01.11 |
카페지기들의 고민 (0) | 2012.01.07 |
기타 (0) | 2012.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