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동
이공일이(2012) 연초에 작정, 3개월쯤 하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슬그머니, 발을 뺐다. 봄바람, 여름바람에는 밖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동이 된다는 나름대로의 합리화를 거치고 나니, 마음편히 운동을 접을 수 있었다.
결과는 이공일이를 넘어가는 날들을 "혹독한" 감기로 마감했다. 밤새 기침과, 가래... 이놈의 가래는 감기 3주가 넘었는데도 가라앉질 않는다. 다시, 이틀째 트레이드 밀에 올라섰다. 아이패드에 드라마를 틀어놓으니, 1시간 꺼덕 없다. 트레이드 밀에 있는 "3"이란 숫자는 시간당 3마일로 걷는 걸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됐다. 숫자 3에서 걷는다 했더니, 나보다 젊은 엄마, 늙은 아줌마,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나를 본다. 숫자 "3"은 너무 하다는 것이다. 그건 "할머니"들도 할만한 것이라는 것. 그러나 다시 시작한 운동, 지치게 할 마음은 없다. 저질 체력이란 결론을 얻었지만, 이글을 쓰면서 "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디냐 싶다. 그런데 1년을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저질"이 "중질" 정도는 되어있을 수 있을까?
2. 만남
이공일이 겨울에 나는 조금 외로웠다. 오프라인의 친구가 없다면, 온라인으로라도 친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까지를 했던 걸 보면, 꽤 외로왔던 것 같다. 마치 본능처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관심이 갔다. 오래 살다보니, 또 장사를 하다보니, 이래저래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 지역에 새로 이주해온 한인들은 사람들을 알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그들을 엮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 "고향맛"이 조금 담길수 있다면. 내가 정성을 들이면, 나를 통해 만나지는 사람들도 그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이공일이는 사람들과 함께 마쳤다. 야유회란 뻑적지근한 모임을 통해, 그레이 부루스 한인들이 모였고, 실업인협회 모임에서는 몇번의 회의와 송년파티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주 만나는 아줌마 수다모임, no name 모임에서는 "쿠바"라는 여행을 완성하기도 했다. 오프라인이 활발했고, 그만큼 보람이 있었다. 백인이 판치는 이런 시골에서는 한인이란 것 자체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조용히 살려는 한인"들도 꽤 있더라. 이유가 어떻든, 그런 이들을 너무 알은체 하다가는 물벼락 맞는다. "눈치 100단"이 되어야 한다. 한두번 건드려보고, "움직일 마음이 없음을 알게 되면" 재빨리 발을 빼야 한다. 나의 촉각이 잘못되어, 명단에서 빠져나간 이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을 제외하고 가능한한 서로간에 소통이 가능하도록 다리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내가 처음 이 지역에 와서, 도움받았던 것들을, 그대로 전수해주고 싶었다는 이야기.
말하다보니, "자화자찬"이 된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요주의 인물, 오지랍 넓은 주책"으로 인지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리고 오며가며 자연스런 만남을 이용했던 것도 밝히자. 이런 말을 꼭 하고싶어진다. "나 사심이 없시다"... 라고 나팔을 불려는 순간, 그레이 부루스에 "한인회"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그런 "사심"이 있다는 생각이 뒤에서 머리꼭지를 잡아당긴다. 이런 것도 어떻게 보면, 엄청난 "사심"일른지 모른다. 그저, 공론화되도록 벨빠진 사람처럼 "주문"을 외워본다. 필요하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공론화되면서 정착이 되리란 생각으로. 나 하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붙잡고.
이공일이에는 "빈집 증후군"을 겪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살갑게 굴던 둘째가 집을 떠나고, 막내와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조금 서툴렀다. 그애는 엄마가 무얼 하는지 전연 관심이 없었다. 보고있으나, 보지 않았고, 들리지만 듣지 않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전에도 그러하였을텐데, 나는 그걸 잘 몰랐다. 그런데 연말 막바지엔, 아이들과 가족으로 풍성하게 마감했다. 막내와의 관계도 꽤 많이 회복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무조건 "신뢰"하기로 하였다. 성적이 잘 못 나오고, 엄마에게 숨기는 그런 것들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이겨넘기려는 "마음의 노력"은 인정한다는 말이다.
"신뢰"는 결국 "나 편하자"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게 꽤 효과가 있다. 아이들과 대등한 위치가 되어간다. 그애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주어지고 있으며, 부모는 책임보다는 "지켜봄"으로 한자리 물러나 앉게 된다.
3. 블로그
이공일이에 시작했던 "나"를 3인칭 하는 것이 효과를 봤다. 반성을 위해 글이라도 써보자, 했던 것이 주효했다. 할만큼 했다. 글감을 끄집어내어, 스크린화 시켰다. 한구석에 쌓아놓았다가, 버려버리는 일들을 경계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글은 왜 댓글이 없나, 그게 의문이다. "인기"는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이긴 하다. 교생실습때 나를 절망시켰던 사건은 내가 정성을 들였던 중학교 남학생들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생 마지막날, 한가득 아이들에게서 "선물"을 받은 어떤 선생을 보면서, "나는 교사가 될수 없겠구나" 포기했다. "댓글"이 많은 블로거를 질투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블로거들과 깊은 교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낯을 두껍게 하고, 내 길을 가야 한다.
4. 엄마
이공일이에 기억에 남으면서도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던 이야기중에는 "엄마"가 있다. 나도 엄마처럼 늙고싶다. 아직도 정정한 84세의 할머니. 작년에 넘어지셔서 손목뼈가 부러졌었다. 그 긴 시간 혼자 보내셨다. 한손으로 밥해먹기, 생활하기를 다 해내셨다. 자식들은 청소하는 사람이라도 구해보려고 하였다. "아직은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더 "힘들어지면" 그때 구해달라신다. 자식들이 모였을때는 누구보다도 늦게까지 깨어있으셨다. 자식들의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듯. 치매를 걱정하신다. 만약에 치매 때문에 "헛소리"를 하게 되면, 양로원에 보내라 말씀하셨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알일이지만, 어쨋든 그 마음의 결심이 단단해서 존경스럽다. 엄마가 손목을 다치신후 나는 몇번 엄마와 함께 잠을 잤다. 함께 김치도 담그고, 떡도 만들고, 텔레비전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지난 신정에는 전날 엄마집에 방문해 함께 자고, 세배올 자손들을 기다렸다. 아침 나절부터 한복입고 기다렸는데, 모두가 1시가 넘어서 도착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기다림을 나도 함께 느꼈다. 절 넙죽하고, 엄마가 줄 세배돈을 받아드는 것으로 끝나는 그 행사를 위해 엄마는 새벽부터 점심상을 보고 그러셨다. 나는 처음에 입었던 한복이 거추장스러워 사람들이 마구 올때쯤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엄마는 수시간 한복을 입고, 자손들을 맞았다. 그리고 자식들이 떠날때까지 편하게 엉덩이를 붙이시지 못하신다. 좁은 엄마의 집에 꽉 들어찬 가족들을 보며, 일분이라도 그들을 붙잡아 두려는 갈망을 들키신다.
이공일삼에는 엄마에게 가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겠다. 손목다쳐서 냉동고에 보관해놓은 도토리를 그예 묵가루루 만드신다 하니, 그때 가서 노력봉사할 것이다. 그밖에도 엄마옆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5. 50살 보내기
이공일이가 내게 특별했던 까닭은 나의 인생 5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 몇번의 생리불순이 이어졌고, 50세를 기준으로 깨끗하게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는 건가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몸의 상태가 생리가 있다고 임신이 될수 있는 몸이라는 건 아니겠지만, 어쨋든 아직은 오래 간직한 "손님"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갱년기 타령은 조금 더 밀쳐두어야 할 것같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는 맹렬함을 보였다. 온가족이 모였던 지난 연말에는 몸 컨디션이 45%에도 못미쳤는데, 음식, 청소, 돌봐주기 등에서 80% 이상의 역량을 보였다. 나를 광고하고 홍보하는 데 그만큼 열성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아픈 중에도 만나야 할 사람, 초대받은 곳 등에는 열심히 쫓아다녔다. 가지 못했던 곳은 교회였다.
나는 앞으로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삶일지라도. 그것이 나의 진 모습이다. 수많은 죽은 사람들을 읽는다. 역대상에 들어서니,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들..... 이렇게 끝도없다. 그들 모두 2천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도 누구의 딸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아이들도 누구의 딸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 삶이 씁쓸하기만 하다. 이 세상에 온 까닭도 모르고 떠나게 될까봐 더욱 초조하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을 알고, 그 사명을 완수하고 떠나고 싶다. 일이공삼 새해에 추를 무겁게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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