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겨울눈을 만나면 블로거로서 생각하는 게 있다. 눈 이야기를 너무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그게 잘 지켜지지 않는다.
내리는 눈만큼이나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이걸 풀어내야만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럴때 이 불로그가 "기록"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미친다. 그리하여 쿠바의 여름에서 부루스의 겨울로 잠시 키를 틀어야 한다.
예지력있는 예술가는 인류의 재앙을 "인터넷"이나 "정전"등에서 찾기도 한다. 그 "정전"의 시간들이 캐나다의 최대도시, 그중에서도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사는 중심지중인 노스욕에서 작년말 벌어졌다.
쿠바에 갔다와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날 엄마가 겪은 악몽의 3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쿠바로 떠난 바로 그 다음날 토론토에는 얼음비(freezing rain)가 주말동안 내려 온 도시가 꽁꽁 얼어붙고, 설상가상 정전까지 덮쳐 그야말로 "블랙(black) 크리스마스" 였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작아진 엄마는 "인간이 삽시간에 거지가 될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셨다고 혀를 내두르셨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딸 하나는 그 시간동안 미국에, 우리집은 쿠바에, 또 토론토에 살고있는 다른 딸도 있었지만, 그집도 정전이 되었고 얼음비가 차를 얼려서 그것을 깰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정전"이 되었더라도 "금방" 불이 들어오겠지, 하고 기다린 것이 3일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4층짜리 엄마아파트의 엘리베이터도 작동을 안하고, 전화도 울리지 않아서 전화조차 안된다고 믿고 계셨다 했다. 간신히 계단을 통해 로비에 내려오니, 한인교회 소속 몇분이 부루스타에 물을 끓여서 라면에 부어주어서 그것을 들고 다시 4층으로 비틀거리며 올라오셨는데, "거렁벵이도 그런 거렁벵이가 없었다"는 게 엄마의 말씀이시다.
나도 현장에 없었던 사람으로 자식들은 뭐했나 싶기도 하다. 연락이 닿았다 해도 먼데서 빙판길을 헤치고 달려올수도 없었을 것 같다. 가까운데 언니가 한명 살지만, 그집도 정전은 마찬가지, 이틀후에야 엄마를 찾아뵐수 있었다고 하니. 엄마는 아파트여서 그런지 추위보다는 먹을 것 없는 것과 할수 있는 일이 한가지도 없었던 일이 가장 참기어려웠다고 하셨다.
한국방송이 나오는 텔레비전이 말벗이 되었는데 그것이 없이 살아야 했던 시간들. 엄마는 무언가 텔레비전 말고 할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놔야 한다고 그때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내가 토론토를 방문했을때 돋보기로도 보이지 않는 책들에 대한 불평을 말씀하시면서, 조금 활자가 큰 책이 있는가 내게 물어보셨다. 그래서 모시고 직접 서점에 갔다. 작은 서점이라 책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엄마의 마음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는지, 볼만하다 싶은 책을 발견해 한권 장만하였다. "정전"이 되어도 할수 있는 일을 만들어놓는 것도 어떤 "재해" 대비책이 될수 있겠다.
얼음비를 세게 맞은 나무들은 툭툭 부러져 지붕위로 쓰러지기도 하고, 정전복구가 늦은 집은 근 일주일 이상을 혹한에서 떨며 견디었어야 했으니. 대부분의 뉴스들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얻어들어야 함에도 이번 정전 사건은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함께 겪었던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정전을 피해간 집에 모여서 함께 지내기, 커뮤니티 센터에서 모여서 추위를 극복하기 등의 소식들을 전해들었다.
갤러리아 식품점등은 비상영업을 하기도 했는데, 가장 많이 팔린 것은 부루스타용 부탄개스였고, 라면과 그냥 먹을 수 있는 즉석음식들이었다나. 집집마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쌓였겠지만, 그건 다시 겪고싶지 않는 일일터이다.
정전보다 더 큰 일은 없을 듯싶었다. 그러나 그에 버금가는 일이 일어났다.
지난 주말 겨울방학을 집에서 보낸 막내를 학교로 데려다줘야 하는 일이 있었다. 딸은 친구들과 송년, 신년을 몰려다니며 보내고, 아빠를 돕겠다며 가게를 보고, 일요일날 토론토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때쯤부터 날씨를 주목해보는데 영 심상치가 않았다. 날씨가 안좋을지 모르니, 토요일쯤 데려다 주고 그날 돌아왔으면 어쩌면 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도 토론토 간 김에 하룻밤 자면서 볼일을 보겠다는 꼼수가 있어서 일요일날 남편과 같이 토론토로 내려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맞추었다. 나는 예배가 끝나고, 남편은 가게일을 헬퍼에게 맡기고 가야 하니, 저녁쯤 출발할 수 있었다. 토요일 저녁까지 90%는 그 계획대로 하자고 했는데, 그밤서부터 흉흉한 소식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대의 폭설과 폭풍을 동반하고, 혹한이 예고된다는 것. 일요일 저녁부터 심해진다는 소식이다.
눈길이라 남편과 같이 가려고 했는데, 그야말로 발이 묶일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계획을 전면수정했다. 교회도 못가고, 아침부터 준비해서 나혼자 막내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엄마집에서 하룻밤자고 돌아오자고. 그날 아침 남편을 가게에 출근시키며 "혹시나" 해서 비상식량을 그에게 챙겨줬다. 밥, 쌀, 김치, 컵라면, 그냥라면, 쌀국수등.. 그리고 나도 "혹시나" 해서 여러벌의 옷을 챙겼다. 차에는 담뇨와 초, 성냥, 초코렛등 비상용품도 비치하고.
그날 그렇게 남편은 가게로, 우리는 토론토로 떠났는데, 나는 그날 이후 5일간을 토론토에 발이 묶였었다. 내가 사는 고장이 폭설, 폭풍우가 가장 거세서, 모든 도로가 막히고, 일단 눈을 못치우면 집에서 차를 빼낼수가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약간 춥기만 할뿐 날씨가 괜찮았던 토론토에서는 그런 소식들이 영 피부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은 돌아오지 말라는 메시지만 나에게 날렸다. 나중에 들은 소식중에는 동네 임산부가 응급차를 불렀는데 워커톤에과 포트엘긴에서 오는 두대가 다 눈에 빠지고 마지막으로 체슬리 응급차가 와서 실어갔다는 소식, 주말 동안 총 400대의 차가 눈이 막혀 옴싹달싹 하지 못했고, 우리 동네 철물점의 지붕이 내려앉아, 사람들이 대피했다는 소식등이었다. 지붕에 쌓인 눈이 떨여져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이 부상당할까봐, 동네 청년에서 돈을 줘서 치우게 한 것은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이 "억지휴가"를 즐길수도 내팽개칠 수도 없어서, 매순간 묘한 기분이었다. 보고싶었으나 못만났던 도시 친구들을 만나고, 친구집에도 가고, 엄마와 서점에도 들리고, 엄마와 팥죽을 해먹고, 동생 언니가 엄마집에 와서 함께 웃고 떠들기도 하고.. 나름 즐거우려고 애썼는데, 무언가 나사빠진 사람처럼 얼얼했다.
겨우 날씨가 좋아져서 집에 왔는데, 남편도 일요일 일터로 갔다가 목요일에나 돌아올수 있었고, 오자마자 드라이브웨이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얼굴이 거무죽죽, 푸릇푸릇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드라이브웨이에 쌓인 눈을 치우는 그를 보니, "그 사건"이 떠오른다. 쿠바에서 돌아온날, 동생집에서 가족들과 연말 모임을 갖고 새벽녘에 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집에 가까와오자,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이 밤에 집으로 들어갈수는 있을까? 아마도 길거리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가야 할거야, 그런 생각으로 집에 왔는데 드라이브웨이 눈이 치워져있었다. 우리 모두가 "와"하고 감탄했다.
일주일간 눈이 오지 않았었나? 하는 건 내 생각이었고, 남편은 바로 앞집 남자 토머스가 우리 드라이브웨이를 치워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큰 눈차가 있어서 집앞의 눈을 가끔씩 치워주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우리가 여행을 떠난 것도 모르고, 그렇게 친절을 베풀만큼 가깝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사람에 대한 우리의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쿠바에서 가져온 "ron"주를 들고 찾아갔다. 술을 주는 우리들에게 그는 "뭐 그럴것까지야" 하면서, 받았는데... 사실 그럴 것까지야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집 드라이브웨이는 먼데 사는 솔이아빠가 치워준 것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솔이아빠는 우리집에 와서 제설기를 꺼내서 싹 치우고 돌아갔는데, 설마 50분 거리에 사는 그가 와서 치워주었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 사건 이후로 우리는 솔이아빠를 미스터 토마스라고 부르고 있다.
얼음도 녹일만한 우정을 받으니, 이 겨울이 더이상 춥지만은 않다. 엄마에게도 다짐했다. 자식들에게서 전화오는 것만 기다리지 말고, 자주 전화를 하시라고. 그래야 이런 비상시에 다른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멀리 살지만, 엄마가 필요한 것들을 수소문해서 보살펴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 결국 사람살이로 이 글이 끝마쳐지고 있다.
재앙도 재해도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면, 훨씬 견디기 쉽고, 한편으론 즐거운 놀이처럼 된다는 것을 여러 사건으로 배운다. 그리고 나는 그 험상궂은 일기로부터 묘하게 비켜서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기쁘거나 그렇진 않았다. 오지말라는 남편의 말을 무시하고 "무소의 뿔처럼 들이밀며 오고싶은 마음"이 왜 나는지, 난해했으나, 가족은 어려움도 함께 겪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나? 남편은 비상식량을 알뜰히 먹었고, 다른 데로 갈 발이 묶인 동네사람들은 그 혹한에도 가게에 들러 물건을 샀으니, 뭐 그다지 나쁜 경험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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