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드립니다.
그날 저녁의 대화는 참으로 가슴에 남겨질만한 것이었습니다. 내안에 갇혀있던 상상들이 선생님의 의견에 맞물려 다시 날개를 퍼득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민의 땅에서 한 가족이 뿌리를 내리고 굳건히 일어서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줄요.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땅에서 손벌리지 않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결혼시키고 사는 것이 그렇게 녹록치 않은 여정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장시간 일하는 한인이 많은 이땅에서 생업 이외의 것에 신경쓰기에는 마음의 여유들이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자식이 결혼하고 이제 그들의 아이들까지 커가는 것을 보는 이민1세대가 많아져갑니다. 내 자녀의 자녀들은 그야말로 “생긴것만 다른” 캐네디언들이 되어 살게 되는 것을 옆에서 보게 됩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세대, 조부모세대의 가르침이 없는한, 큰 자각없이 캐나다사회에 동화되어갈 것입니다. 이땅에서 태어난 제 아이들도 다른 캐네디언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너 어디서 왔니?”라고. “캐나다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네 근본이 무엇이냐?”고 재차 묻는다지요. 그럴때 2세 3세 아이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자랑스럽게 한인 2세임을 3세임을 설명해줄수 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후손들에게 해줘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민족의 후예로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세대는 현재 이땅에 살고있는 이민1세대들이라고 말씀입니다.
그것도 아이들 키우고 일을 해야하는 젊은이들이 아닌, 은퇴시기를 전후한 중장년인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그레이 부루스에 와서 산 세월이 지나간 시간들중에서 가장 긴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얼마전 발견했습니다. 고향에서 산 시간보다도, 학교생활했던 서울의 시간보다도, 이민와서 처음으로 정착했던 토론토보다도, 그레이 부루스의 삶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는 사실에 저도 놀랬습니다.
저는 그저 이땅에 있는 한인들과의 즐거운 만남만을 생각해오곤 했습니다. 캐네디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어야 하지만, 그럴만한 여건을 만들진 못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한인친구들과의 만남만큼 속이 시원하고 즐거운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친목 정도의 모임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 잘 놀자는..
그런 저의 취지에 선생님은 저의 시선의 각도를 90도 정도 더 넓히셨습니다. 한인들간의 친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셨지요. 한국문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씩 시간과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하셨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연, 산수등 그런 것만 공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말, 문화등을 습득시켜서 한민족의 후예로 자라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말씀을 듣자니, 사실 내 자녀들에게도 그런 교육을 시키지 못했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자녀를 둔 내가 어떤 자신감으로 그런 일들을 해나갈까, 하는 그런 부분 말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탓”보다는 “네탓”을 하기 마련이라면,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것은 한인들이 주축이된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불평해볼까요? 왜 선배들은 그런 일을 해놓지 않았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그 당시엔 한인들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요. 불평은 결국 내 얼굴로 떨어집니다. 그때부터 열심을 내었다면 지금은 훨씬 달라졌겠습니다. 때문에 지금 자라나는 2세들이나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전철을 밟지않게 우리들이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셨지요.
참으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인들끼리 그저 일년에 한두번 만나 친목을 도모하자고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문화교육이라니요?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선생님의 속뜻을 알것도 같습니다. 의미없는 모임보다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 제대로 목표를 세워서 체계적으로 하면, 오히려 더 많은 후원의 힘들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인자녀들을 위한 여름 캠프, 한국영화 보고 토론하는 모임, 한국책 도서모임등 우리가 할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후반전 은퇴의 시간들을 맞이하게 되면, 무언가 의미있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할일은 정해져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하지 못할일, 아직은 한국의 맛과 미에 대해서 알고있는 우리들이 후손들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설때가 된지도 모릅니다.
평화의 시기에 우리의 힘을 길러놓게 되면, 쓸모있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모국이 어려워졌을 때나, 캐나다 한인들이 어려워졌을때 우리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있다면, 큰힘을 발휘하게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회합이니 모임이니, 그런 단어에만도 경기를 일으키는 이들이 많습니다. 둘만 모이면 모임을 만들고, 파를 나누고, 옥신각신한다는 둥 그런 말들이 많지요. 어떤 모임이 성사되기도 전에 흐지부지 될수도 있고, 뜻이 안맞아 곤란한 경우를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좋은 뜻으로 했다가 나중에 어그러지는 경우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나요? 아무런 것도 시도하지 않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만나고, 또 그들과 문제가 생기면 또다른 사람을 찾고, 그렇게 살아도 누가 뭐랄 사람 없습니다. 어설피 사람들을 묶어놓으려고 하다가 서로간 상처만 입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사실 그런 시선에 억눌려 있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도 하였습니다. 혹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후퇴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모임이 몇몇 지명도 있는 유명인사가 이끌어가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함께 나아가고 힘을 보태야 한다고 강조하셨지요.
그저 한인야유회 힘을 합해 열자는 저의 단순한 생각에 사상과 신념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미없이 친선만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위한 문화운동의 작은 시발점이 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어 봐야겠습니다. 일단은 문화교육을 위한 기금마련 방안으로 가라지 세일을 하면 어떨까요? 서로 쓰던 물품 나누는 것이 되겠지만, 의미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을 조금씩 환원하는 마음들이 되어서, 올바른 것에 그 힘이 쓰여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제 첫길에 선생님의 조언과 관심이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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