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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걸으면서 들으면서 보면서

햇빛이 따뜻한 겨울 오후입니다.

신정에 떠난 "복"이라는 손님이 여러분 집에 당도했나요?

구정은 마치 "패자부활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신정에 세워놓았던 새해 다짐이나,

신정에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인사들이나,

벌써 느슨해져버린 새해꿈들이,

다시금 새옷을 입고

밖으로 인사를 나올수 있는 기회를 주는.


지인들의 새해인사에 무감각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지난 신정에 "새해"에 필요한 마음을 다썼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해외에서의 구정은

사실 추임새에 불과합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 불과하니까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나를 보며, 인터넷 시대를 살고있다는 걸 강하게 느낍니다.

고국의 명절 소식과,

지인들의 설날 이야기에 무심할 수 없는,

한민족의 일원인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지요.





햇빛이 너무 따뜻하여

아침부터 단장하고 사진가방 하나를 들고 나갔다.


차타고 오가면서 언제나 눈여겨본, 찻길 옆의 산책로를 겨냥하고 나선 길이다.

눈으로 덮여있어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알수없어서 처음엔 찻길을 걸었다.


찻길로 다니는 것은 그리 흥미로운 시간들은 아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집에서 듣다만 팟캐스트 "문학이야기"를 마저 듣는다.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 "다만 한사람을 기억하네"를 다룬 내용을 청취중이었다.

권희철 문학평론가가 새해에 어울리는 소설로 골랐다는 그 소설은

인디 여가수와 한 일본인, 그리고 여가수의 전 남자친구가 등장하는 소설로

슬프면서도 희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고즈넉한 목소리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 에피소드는 신정 즈음해서 녹음된 것이고,

나는 그걸 구정에 들었지만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평론가의 의도를 한층 이해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집에서 떠나기전에 평론가의 소개를 먼저 듣고, 집을 나서면서는

그가 읽어주는 

소설을 듣기 시작했다.


아마도 거진 한시간 정도 읽어준 것 같다.

눈으로 읽었다면, 몇분 정도 걸렸을까? 



소설을 들으면서 나는 간간히 사진기를 꺼내 사진을 찍었고,

또 생각도 했다.

길가에 서있는 경찰차를 보면서,

내가 혹 실종된다면 경찰은 나를 추적해 찾아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눈으로는 눈을 쫓으며,

마주오는 자동차 운전자들도 힐끗 쳐다보면서 걸었다.


그러면서, 생각과 걷기와 듣기와 찍기까지

순환하면서 이뤄지는 나의 행동들에 대해서

"멀티작업이 가능한 나의 능력"에 스스로 반하기도 하였다.


김연수의 단편소설은

한마디로 주제를 표현하기 어려운데,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는 1인이 자신도 모르게 될수도 있다"는 

그런 요지라고 하면 말이 될까?


찻길로 한참을 걸어가니, 사이드 로드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스노우 모빌을 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어서 그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때쯤 소설은 끝이났고,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사실 아이들의 이어폰 사용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기만 했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때 귀를 "막아둔다"는 것에 대한 무례함이 싫어서 말이다.

그래선지 이어폰 사용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혼자 차를 탈때나, 이렇게 걷게 될때 이어폰을 사용해보니,

이게 또 엄청 좋다.


보이는 현실과 나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주고,

잠시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는 이어폰을 뺐다.

조용히 사이드 로드를 걷기로 한다.


4대의 스노우 모빌이 내곁을 지나쳐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시 내곁을 지난다.

그들의 속도라면, 아마 왕복 40km는 주파하고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비켜서서 그들을 보낸다.


우리 동네에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낸 보람이 있었다.

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서 편지를 찾는다.




집에와서 시간을 보니, 거진 2시간은 걸은듯싶다.

그동안 너무 추워서 바깥에 나갈 생각을 못했는데,

오늘은 정말 따뜻했네, 하면서 스마트폰의 날씨를 확인하니

영하 -20도라고 나와있고, "혹한경보"가 발효중이다.

체감온도는 -29도란다.


오늘 나의 체감온도는 1자리수 영하의 날씨였는데,

왜 그랬을까 좀 되집어 생각해본다.


그 대부분의 공은 햇빛이다.

그리고 깊은 모자가 달린 오리털 롱코트, 내복, 두벌의 양발, 튼튼한 겨울용 단화등일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덧붙이자면,

내게 새해인사를 보내준 친구들과

나에게 휴식을 주고 가게에 나가준 나의 딸과 남편 때문이다.


막내 미리는 "리딩 위크(reading week)"을 보내러 집에 와있다.

지난밤에는 나를 그리겠다고 이젤을 펴놓고, 스케치하고 물감을 입혔다.


문학등 예술은 작가에 따라 

수많은 주제를 양산한다. 

문학의 경우 너무 파괴적이고, 개인적이고, 침울할 때는 과연 문학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 되묻게 되기도 한다.

인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내가 알수없는, 경험하지 못한 인간의 타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킨다.


그러나 어떤 문학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문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패자부활전 같은 느낌의 구정, 설날.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은 장작으로 불을 지펴봐야겠다.

세상이 각박하고, 힘들지라도,

그 세상에서 내가 할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조금씩 그일을 지어나가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