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구름을 한껏 뿌려놨더니, 비가 오려고 한다. 마치, 에드워드 가든에서 열렸던 야외촬영날 비가 왔던 것처럼.
화장과 드레스등, 비가 오면 안되는 그날 잠시 하늘이 어두어지며 비가 흩뿌렸다. 결혼식이 있기도 전인데 말이다. 꼬마 들러리인 조카딸을 데리고 나와주었던 조카 우순이는 "이모, 이거 오래올 비 아니에요, 지나갈 비야" 하면서 모두를 안심시켰다. 촬영팀 모두는 큰 나무밑으로 모여들었다. 주차장으로 가서 신부를 위해 양산을 챙겨온 것도 우순이었다. 늦게 공원에 도착한 꼬마 남자 들러리 다온이를 마중가서 촬영장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고, 우순이는 내곁에 붙어서, 무엇을 도와줘야 하나, 꼼꼼이 챙겨주었다. 우순이 말대로, 비는 몇분후 그치기 시작했다. 큰 비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우순이 덕분이기라도 한듯, 고마왔다.
몇가지 서툰 부분은 있었지만, 결혼식은 잘 진행이 되었다. 레이드 목사님은 배경이 다른 집안에서 태어난 너무나 다른 성향의 두 남녀가 한가정을 이루는 일에 성심을 다할 것을 두 사람에게서 약속을 받고, 그 둘을 위해 부모님들이 그들을 후원해줄 것을 서약받은 다음, 양가 친척, 친구들을 세우고, 이 결혼식의 증인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또한 약속받았다. 나와 남편은 함께 나가서 아가서 8장 5절로 7절을 읽었다. 나는 한국어로, 남편은 영어로. 그 내용중 생각나는 부분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는 대목이다. 그야말로 "사랑"이 없었다면, 이 힘든 일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레이드 목사님은 두 사람과 결혼전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들었다.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아이들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레이드 목사님도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레이드 목사님은 특별히 이번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언급하셨다. 한국의 친할머니와 가족들, 그리고 작년에 세상을 떠난 루미에게 한국 이름을 주신 이상묵 선생까지.
결혼식이 끝나고, 모두들 로비로 나왔다. 그제서야 로비가 보였다. 예식장은 여러 행사를 동시에 주관할 수 있는 꽤 큰 규모의 센터였는데, 그날은 결혼식 하나만을 치루게 되어있다. 입구가 양쪽으로 있는데, 처음에는 결혼식이 열렸던 쪽 입구에서만 복작거리느라, 더 넓은 로비가 있음을 알지못했다. 예식전에 도착한 사람들이 의례 있어야 하는 접수 데스크가 없다며, 내게 카드를 주기도 했다. 나도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면서 어떻게 접수데스크 하나 만들어놓지 않았나,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그랬었는데, 신부에게 전화했다가 신부를 지키는 들러리로부터 한말씀 듣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혼백이 반은 나간 신부에게 전화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웨딩 플래너"가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 플래너를 고용하는 것도 꽤 큰 비용이 들어, 그 부분을 생략한 대신, 신랑 신부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들이 많게 되었다. 행사 당일까지 이런저런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그들은 스스로를 챙기기에도 힘든 당사자들이었으니. 나중에 보니, 리셉션장앞에 데스크가 놓여 있었다. 식장과 리셉션장이 달라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결혼에서 내가 신경을 썼던 부분이 있다면, 한국적인 요소를 가미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결혼을 계획할때 루미가 "폐백"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말해놓았다. 내가 결혼할 때도 "폐백"을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한동안 폐백 생각은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캐나다에서 딸과 아들을 결혼시킨 이민 선배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폐백을 직접 준비해서 하셨다 하였다. 반응도 좋았고, 의미도 있다며 내게 권하셨다. 그때부터 다시 폐백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게 됐다. 폐백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신랑집에 가서 시댁어른들에게 인사드리는 예식이며, 신부집에서 폐백음식을 준비해간다는 고전적인 내용부터, 요즘에는 식장에 폐백실이 있어서 결혼끝나고 시댁어른들에게 인사드린다는 것까지. 그리고 신부측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는 최근의 경향까지 말이다. 아이들이 결혼약속을 했을때 한국에서 두 사람의 한복을 주문해서 갖다놓은 것은 일단 있었다.
캐나다에도 폐백을 맡아해주는 대행업체가 있다. 그곳에 알아보기도 했다. 돈도 들지만, 음식같은 것은 모형으로 한다 하였다. 폐백 행사를 몇번 보기는 하였는데, 보기에 즐겁다기 보다는 좀 형식적인 면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엄마에게 의논드리니, 엄마는 "폐백"을 드릴 필요가 없다는 강력한 입장이었다. 신랑집에서 폐백을 드리는 것인데, 신랑집이 폐백에 대해서 모를 뿐더러, 신부집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셨다.
"폐백" 음식을 내가 한다는 것도 사실 말도 안되고, 제대로 하지 못할 게 뻔한데 흉내내고 싶지도 않았다. 몇날밤을 고민하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폐백"은 아니고, "한국식 인사"를 하기로 하자는 것. 새 가족이 된 두 사람이 한복을 입고, 큰절을 드리는 것으로 하면 되겠다고 말이다. 신랑측 부모님, 신부측 부모님, 신부측 할머니, 남편의 삼촌 숙모님 이렇게 네번 정도 큰절을 하게 하면 어떨까 싶었다. 이런 의견을 말씀 드리니, 엄마는 "왜 필요없는 일을 하려고 하느냐, 흉이 되지 않겠느냐"며 자꾸 반대하셨다.
"폐백이 아니다. 그냥 새식구가 어른께 인사드리는 자리"이다, 아이리쉬 저먼계인 시댁측에선 한복을 본적도 없을 터이니, 아이들이 한복입고 절하면 특이하고 예뻐보이지 않겠느냐?며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는 "폐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처럼, 도통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더라. 나중엔 엄마가 너무 불편하면, 엄마는 절을 안받으셔도 된다며, 여지를 드렸더니 조금씩 마음을 여셨다. 마침 큰언니네에 병풍이 있었고, 방석도 있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30여년전 엄마가 주문해서 언니에게 선물한 강화도 화문석 돗자리도 있었다. 또 한가지 로즈메리가 입을 한복까지 있었으니. 로즈메리 한복은 한국의 언니가 조카 결혼할 때 입었던 우아하고 고상한 신랑측 색깔의 한복으로 내게 빌려준 것이었다. 로즈메리에게 한복을 입어보겠느냐, 사전에 이메일로 동의를 얻어 우리가 함께 화장실에 가서 한복을 갈아입었다. 로즈메리는 한복이 너무 아름답다며 활짝 웃었다. 사돈어른이 바닥에 앉기 힘들다고 해서, 의자를 놓고 앉았다. 두사람에게 "큰절하는 법" 동영상을 보내주고 연습하라고 했더니, 트리스탄은 꽤 잘한다. 바닥에 엎드려 3초를 세고 일어나랬더니, 충분한 시간을 들인후 일어난다. 나중에 엄마는 트리스탄은 절을 잘하더라, 몇번을 말씀하신다. 나는 루미는 좀 뻣뻣했어 하고 보탠다.
주변에서 환호하며 박수를 쳐준다. 아이들에게 절을 받고 싶어서라 아니라, 여러 사람 모여있는 데서 한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29년전 내 결혼식때 입었던 한복을 입었다. 신부의 한복이 신부 엄마의 한복이 되기까지, 긴 시간이 흘렀다.
리셉션은 결혼때의 긴장이 다 풀어진, 그야말로 만찬의 시간이었다. 음악에 맞춰 나도 입장식을 했다. 사회자가 신부의 엄마와 아빠입니다 하면서 멘트를 하면, 리셉션장 문이 열리며 우리 둘이 행진한다. 미리 착석한 게스트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날의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 엄청난 공이 들어갔다. 미용사로 일하는 막내동생과 시카고에서 온 동생등, 그들의 집중 케어를 받았다. 머리 화장 발톱 손톱 칠하기까지. 시카고 동생은 네일아트를 하는데 온 가족의 발톱과 손톱을 그전날 다해주었다. 나는 신부 엄마라고 최고의 특혜를 받아, 화장도 머리도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그날 오신 분들만 안다. 사람이 "분장"으로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생애 처음으로 "이쁜 여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느꼈다.^^
드레스는 또 어떠했나. 드레스 쇼핑을 4번째에서야 성공했다. 드레스 쇼핑을 하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입어보고, 사갔다가는 환불하고 그래선지, 섬세한 옷감이 뜯긴 것도 많고, 제대로 된 드레스를 찾기 힘들었다. 나도 두번인가를 리턴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루미 미리와 나가서 샀는데, 미리가 많은 옷들 중에서 골라낸 것이었다. 사이즈가 약간 컸는데, 어쨋든 너무 힘들어서 그냥 사왔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내 사이즈는 인터넷 상점에서도 없었다. 다시 리턴해야 하나, 하는데 미리가 그런다. "엄마 드레스는 누구나 딱 맞는게 없어요, 고쳐야 해요" 해서 수선집을 알아봤더니 오웬사운드에 하나 있었다. 가슴부분만 줄이는데 25달러 들었다. 옷을 수선해서 입는 것도 아마도 처음 있었던 일이었던 것같다. 그리고 귀고리까지 아마존으로 주문했다. 귀를 뚫지 않아서 클립형 귀고리가 필요하여 주문했는데 그것도 괜찮았다. 이뻐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날 나는 "엄청" 이뻤다.^^
리셉션은 스피치와 댄스와 노래와 시의 합작품이라고나 할까? 음식과 함께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결혼 뒤풀이로 말이다. 우리집에서는 루미의 바니 이모가 사회를 맡았고, 신랑집에서는 로즈메리가 사회를 맡았다. 음식이 나오면서 순서가 하나씩 끼어드는 식이었다. 음식 나오는 시간과 먹어야 하는 시간, 짬짬이 스피치가 들어가고 건배가 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이었다. 루미가 그렇게 편안한 얼굴로 춤을 추는데, 그간의 모든 스트레스가 그 얼굴에서 나 달아나간 것 같았다. 웨딩드레스에서 일반 드레스로 갈아입은 후 꽃한송이 들고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데, 그 표정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가시를 품은 장미꽃같던 아이가 이제 연약한 코스모스처럼 흔들린다. 이제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났으니, 그 가시를 더는 드러낼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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