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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 루미 미리.

루미의 결혼(끝)




집과 먼곳에서 결혼을 하다보니, 가족들이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엄마네 집에서 온 가족이 모여 이삼일을 지낸다는 것도 그랬고, 토론토 동생네는 결혼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되어있어서 또 그곳도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air B&B를 빌려야겠다 생각했다. 방5개 있는 타운하우스를 금요일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3일간 빌렸다. 내가 생각한 만큼, 온 가족이 모여 밤을 새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런 모양새가 연출되지는 않았다. 엄마집을 편안해 하는 미국형부네도 엄마집에서 주무신다고 하였고, 아이들은 또 동생네서 자고, 우리 아이들은 루미네 집에서 지내서 시카고 동생과 오웬사운드 언니, 그리고 우리 둘 정도 머물렀던 것 같다. 그래도 결혼 당일 아침에는 모두가 숙소에 모여들어 단장하느라 분주한 아침을 보냈다. 때문에 에어 비앤비가 제값을 했다고말하고싶다.


엄마가 결혼식에 참석하실 수 있을까할 정도로 허약해지셨었다. 6월 중순경 아프셨는데,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시더니 그 허약하신 몸으로 많은 가족들이 오면 먹어야 한다고 이것저것 준비해놓으셨다. 나는 결혼식이 있는 주, 화요일부터 내려가서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김치등 담그자 하였는데, 엄마는 내가 내려가기전부터 떡과 멸치, 국물김치, 오이김치, 애기배추 김치등을 해놓으셨고, 내가 간 다음에 오이를 더 사다가 담그셨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이 대사를 어떻게 다 준비할 수 있었을지. 모두 바쁘면 밥해먹기도 힘드니, 쉽게 먹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게 엄마의 주장이셨다. 결혼이 끝나고 엄마는 "결혼식 후 내가 축복받은 것 같다. 웬일인지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이제 백살까지 살것 같다"며 전화속 명랑한 목소리를 들려주셨다. 


다시 결혼전 리허실로 돌아가보자. 결혼 리허설을 마치고는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전통중의 하나인가 보았다. 루미가 리허설후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해서 그럼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이야기했다. 나중에 이민선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은 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는데 무척 인기가 좋았었다고 말해주셨다. 나보고 어떤 준비를 하고 있냐며. 나는 집에서 할형편이 되지 않아, 한식 부페식당을 예약했다. 스틸스에 있는 서울관이었는데 한식, 중식, 일식 부페식으로 했다. 약혼파티를 신랑집에서 했으니 우리가 대접해야지 생각은 했는데, 리허설 대접은 아마도 신부집에서 하는게 맞는 식이었던 것같다. 내가 만들 수 없는 온갖 종류의 훌륭한 음식들이 많아서 리허설 참석 가족들이 즐거워했다. 리허설은 신부측에서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신랑측, 신부측 구분없이 이번 결혼은 그야말로 두집이 거의 5:5로 경비를 지출했다. 신부 드레스부터 각종 경비를 분담해서 내어서, 공평하다 생각이 들었다. 예산보다는 많이 지출이 됐지만,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던 터라 감당할만 하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주일 아침에 온 가족이 숙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마침 미국 메릴랜드에서 영어목회자로 일을 시작한 제부가 와서 함께 말씀을 나눴다. 결혼과 동시에 우리는 또 많은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엄마와 가깝게 살며, 엄마를 돌봐주었던 동생 바니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있어서 그날 마지막 만남이 되는 셈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이어진 이야기에서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바니는 선교사로 10여년간 아제르바이잔에 있었고,  공부로 한 5년간 미국에 있느라, 엄마곁을 오랫동안 떠나있다가 토론토로 와서 진정한 의미의 효를 엄마에게 선물했다. 엄마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엄마의 위급한 상황에 응급차를 부르고, 엄마가 외로울때 들러 함께 밥을 먹어주고... 동생이 힘이 달리면 우리들이 뛰어가 엄마돌봄을 함께 해주고. 엄마를 중심으로 바니는 엄마상황을 틈틈이 체크하여, 가족들에게 통신을 하였다. 바니는 엄마뿐 아니라, 심리상담가인 자신의 직업의 동력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을 줬다. 나도 미리가 아플때 바니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됐다. 우리 모두는 제각각의 마음으로 떠나는 바니와의 이별에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힘들었다. 


시카고 동생은 같이 오기로 했던 제부가 일때문에 오지못하게 돼 두 아이와 함께 왔다가 결혼식후 주일 아침에 시카고로 떠났다. 결혼을 위해 10시간 이상을 차를 타고 왔는데, 그녀의 에너지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기쁨이 된다. 손톱 발톱을 칠해줄 때마다 "힘들지 않니?"하면, 돈을 받고 하면 힘들겠지만, 가족들을 위해 해주는데 조금도 힘들지 않다며, 색이 잘못 칠해졌다면서 내것은 한번 벗겨내고 다시 칠해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취미로 하던 네일 아트가, 가정경제가 휘청일 때 도움이 되기도 했단다. 눈코뜰새없는 와중에도 건강을 위해 테니스를 해서 시합에도 나가고, 자선을 위해 김치를 담그는등 일이 많다고 말한다. 


막내는 또 어떤가? 나를 포함해 수명의 머리를 매만지는 일에 올인했고, 이제 9학년 막내딸 유니는 엄마를 도와서 세트도 말고 벌써 끼가 보였다. 결혼을 위해 조카들은 데코레이션팀에 속해 아침부터 분주했고, 모두 힘을 다해 도왔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트리스탄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루미의 친구중 한명은 이번 결혼식이 "두사람만의 결혼식이 아니라, 두 가정의 만남임을 확실히 알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누구 하나 뒷걸음질 치는 사람없이 나서주었다. 트리스탄의 아버지 프레드는 리셉션에서 너무 많은 "시"를 낭독했다. 알아듣지 못해 좀 지루했으나, 프레드의 유일한 즐거움은 시를 낭독하는 것이라 하니, 50이 넘어 얻은 아들의 결혼에 그가 어느정도 기뻐했는지 알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70대가 되신 시카고 형부는 결혼식전 허리를 삐긋하여 남편이 침을 놓고, 치료했지만 무척 불편해하셨다. 골프가방을 가져오셨던 형부는 허리가 아파서골프도 못치셨다. 우리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이신 형부는 조카들에게 "이모부가 이제 늙어서 오기 힘들어지니, 빨리들 결혼하라"고 농담하셨다. 토론토에 있는 큰언니에게는 집안의 가보인 병풍과 화문석 돗자리도 빌리고, 좋은 결혼식이었다며, 나의 어깨를 추석이게 만들어준 오웬사운드 언니, 그리고 한국에 있는가족들의 응원 우리는 복도 많다.



사실 내가 꿈꿔왔던 결혼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객들이 왔다가 식사만 하고 그냥 가는 결혼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만 조촐히 불러서 가볍게 하기에는 우리 가족은 숫자가 많다. 가족들과 모처럼 모이고, 외모도 좀 꾸며보고, 기억에 남는 예식을 하고싶었다. 교회 가족이 적어서 오실분들이 많지 않았고, 모시고싶은 분들을 초대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예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함께 축하의 자리까지 있어주시기를 바랬다. 하객으로 자리를 빛내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결혼식 초대가 부담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으므로,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나 역시 그랬었을 수도 있다. 혹은 그 반대가 됐을 수도 있으니, 큰일후에는 언제나 후유증이 남는 것같기도 하다. 


루미는 가족 카톡에 눈물바람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동생 미리가 결혼전에 내놓은 선물을 올렸다. 그안에는 동생이 벌어서 마련한 500달러의 돈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봉투에 담겨 있다. 웨딩드레스 값 400달러를 더 달라는 수선 전문가의 전화에 당황할때, 동생이 우선 이 돈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며 준 돈이다. 

 

이 사랑들을 어이할꼬....  






루미가 키우는 두마리 토끼가 신랑신부 모습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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