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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나도 떠나고 싶다

그들이 온것은 저녁청소를 하지않고, 그냥 정신사나운 상태로 막내의 학교 숙제를 봐주고 있을 때였다.


어쩐지 낯익지 않은 발소리가 자박자박 들리더니, 옆마을에 살았던 나영이네 식구가 왔다. 부부와 남매둘.

 

그들은 한2년전에 우리 옆동네로 들어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이민온지, 그때만 해도 1년밖에 안된 신참들이, 우리는 신맛단맛 다 본 후에 어떻게 자리잡게된 이런 시골에 들어오게 된 것도 뜻밖이었지만, 우리와 같은 업종을 경험삼아 하기로 했다고 했다.
호구조사(?) 결과, 한국에 있을때 나영이 엄마는 나와 같은 출판업종에서, 나영이 아빠는 남편과 같은 "특수 군인출신"이었다.

 

말도 설고, 환경에도 낯설것 같아서 오히려 내가 더 걱정이 될 지경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오히려 우리보다 더 씩씩하게 동네사람들과 어울려서 장사를 잘하고 있었다.

 

주변에 한인이 많지 않으니, 가끔 지나갈때마다 커피점에서 커피를 사들고 가게에 들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가게는 다른 이의 것으로 이들 부부가 1년 계약 매니저를 한 것이다. 기한이 되자 이제는 다른 사람것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것을 찾아야한다며 미련없이 매니저 자리를 내놓았다.


작년 8월쯤 일을 놓고 새 가게를 구하기전에 고국에 갔다와야 하겠다며 한달간인가 한국을 방문하고 오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아, 이리저리 바쁘게 발품을 팔고 다니는 것 같았다.


어렵게 찾은 가게와 계약이 될 것 같다고, 그런 귀띔을 해주러 들렀던 것도 벌써 몇달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전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지막!"이라니!

그들이 역이민을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마지막이라고 말할 것까진 없으나, 그들이 이사가기로 한곳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다.


캐나다땅이 세계에서 2번째로 넓다고 하니, 온타리오주만 떠나도 딴 나라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그들이 가기로 한 곳은 알버타주, 칼가리 근처의 한 도시이다. 이름조차 생소해서 기억해낼 수 없는 곳. 비행기타고도 4시간 이상을 가야하고, 그곳에서 차를 타고 또 2시간을 내려가야 하는 곳이라는데, 우리가 지도를 살펴보니, 록키산맥 밑에 있었다.


온타리오는 중부쯤 되고, 알버타는 뱅쿠버가 있는 브리티쉬 콜롬비아 옆에 있는 서부에 속한다.

인터넷으로 찾아서, 그쪽에 있는 가게를 사고, 집도 인터넷으로 보고 계약을 했다고 한다.


가게는 비행기타고 3번이나 가서 알아보고, 흥정해서 싸게 사고...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있는 그래도 규모가 꽤 큰 도시라고 소개해주었다.

 

이사는 트럭을 빌려서 싣고 가기로 했는데, 사나흘은 걸릴 것이라고.

하얀 이삿짐차를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다가 지치면 모텔에 머물면서 가족사에 남을 만한 이주여행을 하고 이제 이삿짐을 풀고 있을 나영이네 생각이 자꾸만 난다.


그집만이 전화하지 않고, 불쑥불쑥 찾아와서, 우리를 놀래키기도 하고, 기쁘게도 했었는데, 이제는 예정에 없는 발자욱 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어진 것 같다.

 

그집뿐이 아니다.

 

시골이다 보니, 우리 마을은 아니지만, 반경 30-40km 이내에 있는 한인들과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이집은 우리가 이사오기전부터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백인사회에 황인종으로 기세좋게 들어왔지만 개척자적 정신보다는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주늑이 들어있던 이주 초창기, 아니, 아마도 며칠이 지나서였을까, 막내가 엉덩이에 큰 고름이 생겼었다.


그 혹이 점점 커져서, 약을 짓고자 남편이 병원에 갔고, 그 길로 입원을 했노라는 전갈이 왔다. 정말,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봐주던 의사가 한인의사가 있으니, 그를 소개해주겠노라 했다며, 그다음부터는 그 한인의사가 아이를 치료했는데(결국 절제수술을 했다), 그들로부터 받은 친절로 새터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작가 황석영씨가 북한에 가보고 나서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글을 썼었던가, 인터뷰를 했던가 하는 기억이 나는데,
우리도 이런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오지"중에 "오지"같은 이곳에도 한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것도 상당히 깊숙히 이 곳 사회에 뿌리내리고, 존경받고 살고 있었다.

 

아이가 입원해있는 동안, 나는 가게보랴, 아이들 뒤치다거리 하랴 집에서 떠날 처지가 되지 않았는데, 의사의 부인이 남편과 아이가 먹을 음식을 해오고, 그러다보니, 다른 마을의 한인이 또 알고, 병문안도 오고, 그러면서 우리들의 언 마음을 녹여주었었다.

 

그 의사네와 우리집과는 각별하게 지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참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젊은 의사 부부네는 여러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보다 캐네디언화되어 있어서, 촌스런 우리들이 모범으로 삼을만했다.

 

아이들 교육에 여러모로 고심을 하더니, 토론토로 움직이기로 작정해서 집을 내놓은 게 작년 겨울이었는데,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서 그집이 이제 6월말이면 이사를 가게 된다.

 

이 두 집이 우리 곁에서 떠나감은 나에게 알게모르게 충격이었던 같다.

 

이전에는 "즐겁게" 잘 살았는데, 지금은 조금 흔들린다.
우물안 개구리가 스스로의 우물에 갇혀 환상에 사로잡혀 살았던 건 아닌가? 하는 내 자화상을 그려보게 된다.

 

최근에 신앙적인 문제들과 맞물려 내가 푸념한 것도 이런 여러가지 일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옆집에 살던 헬렌네 부부가 은퇴시기를 맞이해서, 뱅쿠버 아들네 곁으로 옮기고, 앞집의 존네는 전망좋은 새로운 곳에 집을 지어서 그곳으로 이사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오고, 낡은 것은 이제 우리밖에 없을 정도로 연륜이 쌓여간다.
그러나 그런 것이 기쁜 것만은 아니다.

 

처음에 이사오면서, 이곳에서 10년은 살자,,,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제 9년째에 접어든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것 같은 애인이, 결국 보잘것없어 보여서 떠나고 싶은 배반한 애인의 마음이 되기도 한다.

 

내 애인은 내가 그처럼, 입에 침발라가며 자랑하던 "페이슬리"라는 마을이다.

 

내 때깔이 벗어지고, 내 사람꼴이 배기기 시작하는데 도움을 준 내 사랑하는 마을을 버리고,
변화를 찾아서 한번 훌훌 날아보고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이런 엄마 마음을 알면, 그때부터 슬픔에 빠질 것이다.
아이들의 온갖 추억과, 마음과 사랑이 온전히 이 마을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봄바람이 심하게 분다.
새로운 땅으로 친구들을 보내면서, 나도 한번 심하게 흔들려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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