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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그리고 우리

웃지않는 "엄마"

“You didn’t smile today.”
막내가 나를 보며 하는 말이다.
그 말에 안 웃을 수가 없어서 조금 입을 비죽였더니,
다시 힐끗 보더니, “이상한 미소”를 짓는다고 흉본다.
얼굴을 찡그리고, 마지못해서 웃는 “썩소”같다는 뜻이겠지.

 

웃음은 커녕, 말도 하기 싫었다.
그래도, 웃지않는 나를 발견해내고, 나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딸이 고맙게 느껴진다.

 

“어디가 아파?”
라고 남편이 몇번을 물었었다.
“안 아파..”

 

하여간 어제부터 오늘까지, 인상을 엄청 쓰고 있다.

 

어제는 미리의 “걸 가이드”에 엄마 운전사 노릇을 해줘야했다. 다른 두명의 친구를 태우고, 20분 걸리는 곳에 내려놓고, 1시간 30분을 “무슨 짓”을 하든 소일하다가, 다시 아이들을 태우고 각자 집에 내려놓는 것이 내 임무다.

 

다른 두 엄마와 번갈아가면서 하는데, 한 엄마가 짜준 스케줄을 보면, 내가 가장 적게 수고하게 되어 있다. 어쨋거나, 그날이면 “가이드”가 있는 동네의 한인 가게에 들러 그동안 미뤄둔 수다를 떨고 오는데, 어제는 정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벌써 몇달전에 갔다왔으니, 월요일이 되면, 미우나 고우나 기다리기도 할텐데, 안면을 판판하게 펴서, 두루두루 세상사는 일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나영이 엄마 언니이니, 그집이 잘 도착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한 것도 있었는데 말이다.

 

어쨋거나, 그 시간을 또 조금 운전하고 가서, 시장을 봐서 돌아오니 15분 정도의 여유가 남아있었다.

 

차를 강가에 있는 공원으로 돌렸다.
작년에 봄이 무르익을 때 와서, 삶의 경이를 느꼈던 그곳은 이번에 늦게 내려부은 눈과, 다시 차가와진 공기로 인해, 사람의 인적이 끊긴 적요한 공간이 되어있었다.


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차를 주차하고, 눈을 감았다.

하루종일 울고싶었던 기분으로, 그래도 마지막 힘을 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오늘 몇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마치고 나서 눈을 들어보니, 시야가 밝게 개어보였다.

 

그렇다.
지금 나는 위기에 처해있다.

아이들과 남편에게 둘러싸여, 마냥 “슬픔에 빠져있을 수도 없는” 한 엄마가 존재론적 위기를 느낀다.

 

내 안에 있는 두 하나님의 문제.

 

나를 보호하고 사랑으로 나와 대화하던 그 하나님에게 나는 호소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만이 아니시라면서요, 온 몸과 마음을 드리지 않는 그런 신자는, 내 너를 모른다 하시는 심판의 하나님, 두려움의 하나님, 모든 일에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서요.
아니, 어쩌면 내가 알던 하나님이 당신이 아니신가요?
당신의 구원계획에 제가 없는 건 아닌가요?
요즘 목사님의 설교를 제가 가시눈이 되어서 듣습니다.
그 안에 잘못된 것이 없나 해서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예정론, 구원론, 내세론이 나를 닦아세웁니다.
물론 한편으론 많이 찔리기도 합니다.
아직도 내안에 내가 죽지 않아서, 모든 손짓 발짓이 하나님에게 향해있어야 한다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살아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선지자적 울부짖음같은 목사님의 설교를 듣노라면…
내가 못한다고, 목사님의 말씀에 비판의 눈을 걸어놓아야 한다는 것에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내 안에 있는 욕심의 문제

 

“돈”을 무시하다가, “돈”이 있어야 될 일을 상정하고 나니,
“돈”이 들어가는 일에 “상처”를 당한다.
가게 경영에 미숙함이 생겨, 쓸데없는 “돈”이 들어간다.
가끔 손해도 보면서 장사하는 것,
그런 것들이 그렇게 나를 구속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늘 아침, 남편과 이야기를 했다.

 

1번은 빼고 2번을 이야기했다.
1번은 나 혼자 감당하기에도 벅찬데, 그가 끼어들면 더 한층 복잡해질 것 같아서 살짝 뺐다.

 

남편은 40대 부인에게 닥쳐온 “우울증적 신호”에 민감해져있어서, 주의깊게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가게 경영과 한의원에서 나는 뒷짐을 지고 있으니, 모든 것을 그가 해야하고, 모든 실수도 그에게서 비롯된다. 지켜보는 나는, 그에게 불평이 가다가도, “하지않으므로 실수할 일이 없는 나 자신”에게 생각이 미쳐 그것 또한 마음이 아파진다.

 

가령 광고같은 것, 그는 섬세하지 않다. 그가 하는 “한의원”은 선전이 무척 중요하다.
광고문의가 오면 그는 그저 약간의 정보를 주고 그들이 매체에 실어주는 댓가로 돈을 준다.
나는 제대로된 정보를 주고, 가능하면 디자인까지도 간섭해서, 정확하고 확실한 “돈을 쓴만큼 효과가 있는” 광고를 하길 바란다.

며칠전에 거금을 들여 광고를 했는데, 무엇을 선전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그런 문구와 디자인을 트집잡았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간단하다. 그들이 그만큼 신경써서 광고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우리가(당신이) 챙겨줘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 나의 불만.
어떤 것은 전화번호까지 예전것이 나와있다. 활자에 대한 무감각증이 나를 짜증나게 만든다.

 

“광고”이야기를 했더니, 그야말로 “작은 일”에 그렇게 기분이 침체되어 있었냐며 의아해한다.
당신에겐 작은 일이어도, 활자에 민감한 나같은 사람에겐 그렇지 않다며, 앞으로의 광고관련 문의는 내가 다 맡아서 하겠다고 했다. 디자인도 필요하면 내가 하고. “신경쓸 일”이 많은 사람에게 불평만 해대다가, 그렇게 생각을 바꿔먹어본다.

 

그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돈"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약간의 <쓸데없는> 지출에도 마음이 상하는,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내 욕심을 버리고 당신의 계획과 가정경제 운용을 따르겠노라는 나의 말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집안일이 되어나간다면, 무슨 힘과 재미로 꾸려나가겠냐고, 함께 보조를 맞추자고 한다.

 

아직도 웃을 힘이 없다.
그러나, 크게 두 문제이므로 그리고 쉽게 끝날 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가슴속에서 내 숙제로 붙잡고 씨름해야 할 일이다.

 

이제 “슬픔에 빠져있을 허용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아이들이 몰려올 시간이기 때문이다. 잠시 “슬픔”을 보류하고, 기운을 내서 “웃는 엄마”를 연출하자. 연기력이 부족하여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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