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you teach me,
you touch my heart”
7살 막내가 선생님에게 보내는 카드의 내용이다.
한국말로 번역하려고 하니, 그 감이 잘 안온다.
며칠전, 담임의 생일이라며, 조그만 선물을 줘야한다고 했다.
가게에서 크리스탈(물론 가짜)로 두 마리의 곰이 앉아있는 것을 골랐다.
선생님과 자신의 모습이라며.
카드는 선물백에 달린 것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아침에 살펴보니, 작은 지면에 빽빽이 들어찬
삐뚤빼뚤한 글씨.
“선생이 얼마나 괜찮으면 그런 글을 전할까" 하지 않고,
"역시 내 아이는 정도 많고, 표현도 잘한다”고 회심에 젖는다.
올초쯤 한국에서 남편의 동생(아이들 작은아빠)이 방문왔었다.
한 2달 같이 있으면서 일도 도와주고 했었는데,
갈때쯤 되니 그동안 정이 든 아이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
송별연을 베푸는 자리에 막내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엄마인 나는 꼬마가 무얼하느라 늦는지 안다.
제 엉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느라
다른 사람 식사가 다 끝날때까지 얼굴을 디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날 막내가 만든 것은 온 식구 얼굴이 들어가 있는 그림 한장.
색도 칠하고, 이름도 써넣어서 만들었다.
그 그림을 사진틀에 넣어주었다.
한국에 가면 잊지말라고 그린 것이라며, 제 작은아빠에게 주고 뽀뽀.
“역시 내 아이는 정이 많아”이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작은아빠가 사랑으로 아이를 대해주고
점수를 얻은 것은 고려에 넣지 않고 말이다.
며칠전에 치과에 갔다오다, 식당에 들렀다.
언니가 딴짓하는 사이, 물컵을 마주하고, 나와 앉자
“우리 데이트할까?”하고 운을 뗀다.
“이름이 뭐지?”
나에게 묻는다.
“민디!” 했더니,
“나는 데이빗(남편의 영어이름)”하고는 코를 벌렁거린다.
꼬마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한참 웃는다.
나도 며칠전 복수를 했다.
지난 주말 동네에서 펼쳐졌던 크리스마스 퍼레이드가 끝나고,
핫 초코렛과 쿠키를 얻어먹으러 교회로 갔다.
식탁에 앉자,
막내가 데이트 하는 포즈로 지긋이 나를 본다.
내가 네 이름이 뭐지 하니, “미리”한다.
당신은? 해서 “브랜든” 했더니 죽는댄다.
브랜든은 얼굴에 깨소금이 잔뜩있는 제가 좋아하는
같은 반 남자친구이다.
지금은 이렇게 사랑을 날라주는 작은 천사이지만,
그 애가 태어날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세째는 계획에 없었는데, 어떻게 들어서게 되었다.
그 애를 임신하고, 참으로 감사함을 몰랐다.
오히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푸념했다.
친구중에 결혼 10여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는 집이 있었다.
혼자, 심각하게 아이를 그집에 주는 건 어떨까 생각까지 했다.
또한 입양을 원하던, 한국의 언니에게 아이를 키워달라고 맡길까 생각도 했었다.
(나는 아이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비정한 엄마)
지금은 그런 공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속이 화끈 달아오른다.
임신 7개월만에 회사에 휴직원을 냈다. 그때까지도
전연 표시가 나지 않을정도로 배도 부르지 않았고,
펑퍼짐한 옷을 입고 다녔으므로, 내가 발설하지 않는한,
임신사실도 알아채기 힘들때였다.
동생의 결혼도 있고 해서, 그래도 2달전에 그만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었다.
동생의 결혼이 끝난 다음날,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니, 다급한 상태라고 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없이, 우리 애가 7달만에 나오려고 하는 참이었다.
마취, 수술, 출산의 수순을 밟고 본 아이의 모습.
신생아의 삼분의 일 크기밖에 안되는 작은 생명.
인큐베이터안에 들어가야만 했던 내 아이의 모습이었다.
나에게 쉬쉬하지만, 아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가 보았다.
입원 이틀째인가, 내 산부인과 담당의였던 한인의사가 병실에 왔다.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라는 말.
그밖에 무슨 말을 더 했는지,,, 창밖의 먼곳을 쳐다보며,
조그맣게 말하는 그 의사의 침울한 표정…
아이 가슴의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나 울고, 부르짖고, 발버둥쳤는지.
사랑없이, 준비없이 엄마가 되려고 했던 이에게 내려진
하늘의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학의 도움이던가. 아이가 소생했다.
그리고 한달간의 인큐베어터 생활을 마치고 나에게 안기게 됐다.
4살까지 키우기 까다롭더니, 이제는 아주 의젓해졌다.
매일 저녁, 책읽기가 끝나면, 롱버전의 자장가를 불러주고
뽀뽀해줘야 자는 내 딸.
그녀는 내일 새벽이면 또 내방에 기어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까지나 내 가슴에 폭 안기는 그애를 안고,
“자꾸 엄마방에 오면 안되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한잠 더 자게 될 게다.
언제나와 같이. 남편과 아이 사이에 낀 샌드위치로.
you touch my heart”
7살 막내가 선생님에게 보내는 카드의 내용이다.
한국말로 번역하려고 하니, 그 감이 잘 안온다.
며칠전, 담임의 생일이라며, 조그만 선물을 줘야한다고 했다.
가게에서 크리스탈(물론 가짜)로 두 마리의 곰이 앉아있는 것을 골랐다.
선생님과 자신의 모습이라며.
카드는 선물백에 달린 것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아침에 살펴보니, 작은 지면에 빽빽이 들어찬
삐뚤빼뚤한 글씨.
“선생이 얼마나 괜찮으면 그런 글을 전할까" 하지 않고,
"역시 내 아이는 정도 많고, 표현도 잘한다”고 회심에 젖는다.
올초쯤 한국에서 남편의 동생(아이들 작은아빠)이 방문왔었다.
한 2달 같이 있으면서 일도 도와주고 했었는데,
갈때쯤 되니 그동안 정이 든 아이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
송별연을 베푸는 자리에 막내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엄마인 나는 꼬마가 무얼하느라 늦는지 안다.
제 엉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느라
다른 사람 식사가 다 끝날때까지 얼굴을 디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날 막내가 만든 것은 온 식구 얼굴이 들어가 있는 그림 한장.
색도 칠하고, 이름도 써넣어서 만들었다.
그 그림을 사진틀에 넣어주었다.
한국에 가면 잊지말라고 그린 것이라며, 제 작은아빠에게 주고 뽀뽀.
“역시 내 아이는 정이 많아”이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작은아빠가 사랑으로 아이를 대해주고
점수를 얻은 것은 고려에 넣지 않고 말이다.
며칠전에 치과에 갔다오다, 식당에 들렀다.
언니가 딴짓하는 사이, 물컵을 마주하고, 나와 앉자
“우리 데이트할까?”하고 운을 뗀다.
“이름이 뭐지?”
나에게 묻는다.
“민디!” 했더니,
“나는 데이빗(남편의 영어이름)”하고는 코를 벌렁거린다.
꼬마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한참 웃는다.
나도 며칠전 복수를 했다.
지난 주말 동네에서 펼쳐졌던 크리스마스 퍼레이드가 끝나고,
핫 초코렛과 쿠키를 얻어먹으러 교회로 갔다.
식탁에 앉자,
막내가 데이트 하는 포즈로 지긋이 나를 본다.
내가 네 이름이 뭐지 하니, “미리”한다.
당신은? 해서 “브랜든” 했더니 죽는댄다.
브랜든은 얼굴에 깨소금이 잔뜩있는 제가 좋아하는
같은 반 남자친구이다.
지금은 이렇게 사랑을 날라주는 작은 천사이지만,
그 애가 태어날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세째는 계획에 없었는데, 어떻게 들어서게 되었다.
그 애를 임신하고, 참으로 감사함을 몰랐다.
오히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푸념했다.
친구중에 결혼 10여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는 집이 있었다.
혼자, 심각하게 아이를 그집에 주는 건 어떨까 생각까지 했다.
또한 입양을 원하던, 한국의 언니에게 아이를 키워달라고 맡길까 생각도 했었다.
(나는 아이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비정한 엄마)
지금은 그런 공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속이 화끈 달아오른다.
임신 7개월만에 회사에 휴직원을 냈다. 그때까지도
전연 표시가 나지 않을정도로 배도 부르지 않았고,
펑퍼짐한 옷을 입고 다녔으므로, 내가 발설하지 않는한,
임신사실도 알아채기 힘들때였다.
동생의 결혼도 있고 해서, 그래도 2달전에 그만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잘한 일이었다.
동생의 결혼이 끝난 다음날,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니, 다급한 상태라고 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없이, 우리 애가 7달만에 나오려고 하는 참이었다.
마취, 수술, 출산의 수순을 밟고 본 아이의 모습.
신생아의 삼분의 일 크기밖에 안되는 작은 생명.
인큐베이터안에 들어가야만 했던 내 아이의 모습이었다.
나에게 쉬쉬하지만, 아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던 가 보았다.
입원 이틀째인가, 내 산부인과 담당의였던 한인의사가 병실에 왔다.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라는 말.
그밖에 무슨 말을 더 했는지,,, 창밖의 먼곳을 쳐다보며,
조그맣게 말하는 그 의사의 침울한 표정…
아이 가슴의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나 울고, 부르짖고, 발버둥쳤는지.
사랑없이, 준비없이 엄마가 되려고 했던 이에게 내려진
하늘의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학의 도움이던가. 아이가 소생했다.
그리고 한달간의 인큐베어터 생활을 마치고 나에게 안기게 됐다.
4살까지 키우기 까다롭더니, 이제는 아주 의젓해졌다.
매일 저녁, 책읽기가 끝나면, 롱버전의 자장가를 불러주고
뽀뽀해줘야 자는 내 딸.
그녀는 내일 새벽이면 또 내방에 기어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까지나 내 가슴에 폭 안기는 그애를 안고,
“자꾸 엄마방에 오면 안되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한잠 더 자게 될 게다.
언제나와 같이. 남편과 아이 사이에 낀 샌드위치로.
'나래 루미 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폐쇄라니... (0) | 2002.12.19 |
---|---|
누명벗기 (0) | 2002.12.14 |
파티---9살 루미의 하루 (0) | 2002.12.14 |
아 창피한 엄마-아이들 필드트립 견학기 (0) | 2002.11.27 |
우리집 밤풍경 (0) | 2002.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