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던가?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 아주 원초적인 시작이라면,
이곳에서는 “그가 거기에 있었기에 만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학식이 높던지 낮던지, 그의 고향이 서쪽이든지 동쪽이든지, 혹은 그가 재물이 많던지 적든지, 그런 것은 큰 상관이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나, 한인이 드문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한인이라는 그 한가지 만으로도
가깝게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곳에 처음 왔을때가 생각난다.
오자마자 가게를 인수해서 장사에도 손이 익지 않은데,
그때 2살이었던 막내 엉덩이에 큰 뾰루지가 났었다.
작아지지 않고 계속 부풀어올라서, 남편은 응급실에 갔다온다고 갔는데,
그 길로 바로 입원까지 해야했다.
그때 담당했던 의사가 한인의사가 이곳에 있다며,
그를 불러주고, 그 한인의가 우리 아이를 맡아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그 병실에 꽃을 들고 찾아와준 이도 그 의사의 부인,
남편이 집에도 못가고 아이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자,
그곳에서 가게하던 부부는 음식까지 담아와서 남편에게
주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낯선 땅에 와서 한인의 도움을 그렇게 받으니,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때 사귄 사람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다. (그 중 한집과는 요즘 뭔가 안풀리고 있긴 하지만..)
또한 이곳에 일가친척 없이 이민온 나의 서클 선배가족은
그들의 푸근한 인심과 넉넉한 마음씀으로 우리가족(이때는 엄마를 포함한 대가족의 개념이다)과는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요즘 자주 못보니, 안부가 항상 궁금해진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
토론토에서 사귄 친구들이 있다. 한창 친해질 즈음, 이곳으로 날라온 우리.
한번씩 나 사는 데를 방문한 친구들은,
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다시 온다는 이들이 없다.
토론토에서 한 3시간.
우리는 자주 오가는 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에 싫증이 날때쯤되어야,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게 된다.
내 대접이 별볼일없던지, 아니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의 분석으로는 바쁜 이민생활에 한 이틀을 소비해야
하는 장거리 여행이 되는 이 길이 그렇게 오기가 쉽지는 않은가보다.
이렇게 사람이 귀하고 보니, 어쩌다 길을 잘못들어
우리 가게를 찾아들어오는 사람들에게까지,
주책없이 밥먹어라, 자고자라 라는 소리까지 나오려고 한다.
작년 여름에 낚시차 온길에 물건을 사러왔다가 만난 한인가족은,
그 담에 다시 방문해서, 우리가 태극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했던 것을 기억해내곤,
태극기를 정성껏 주고 가신 분도 있다.
그런데, <다시 안오는> 징크스를 깬 분들이 있다.
지난 주말, 토론토의 형부와 함께 왔던 이들이 그분들이다.
나 살던 고향에서 이곳에 이민온지 이제 1달된 신참분들.
캐나다 시골을 한번 보러 아이들 학교간 사이 오셨었다.
그분들은 객지인 서산의 한 마을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군 이들이었다.
한국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우리 사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그렇게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당연하게 “다음에는 아이들 데리고 한번 다시 오세요”했다.
아이들도 우리집과 꼭 같이 세딸들.
그런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목요일 저녁 연락이 왔다.
금요일인데 놀러오면 안되겠냐는. 하루밤 잘 준비를 해서 온단다.
피디 데이는 두어달에 한번 있는 학교휴일로 프로페셔날 디벨로프먼트의 약자이다.
선생들이 자기 계발을 위한 세미나를 갖는등, 일반 정규수업외,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하는 날이다.
물론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시라”고 했다.
철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 이민온 분들을 만나는 건 참, 마음에 뿌듯함을 준다.
캐나다살이의 선배라고, 나와 남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우리는 <깊은 소견>은 없지만, 그래도 체험에서 얻어진 지식을 총동원해,
그들에게 필요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주려고 한다.
한국에서도 시골에 살아서, 토론토 생활이 많이 힘들어보인다.
백인위주의 정돈된 선진국을 상상하고 왔다가,
각색 인종, 혹은 살벌하기도 한 도시 분위기에 잔뜩 놀란 표정이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던 아이들이 수업때문에 고충당하는 모습 보기에도 안스러운 것 같고.
한국말 쓰는 아이들과 영어 쓰는 우리 아이들이 그런대로 서로 낄낄거리며 잘 논다.
그런 아이들을 뒤에 남겨놓고 어른끼리 지역 타워에 나섰다.
한 마을에 가서는 가게 수리중인 한인을 만나 같이 이야기하고.
비지니스 감각이 뛰어난 분이었다.
판단력, 분석력이 빠르고.
이제 시간이 조금 지나서 영어환경에 익숙해지면,
이민을 살아내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시 방문해준 저력>이 그들을 다시금 우러러보게 한다.
늦은 나이에 새출발이지만, 그 힘으로 모든 것을 잘 헤쳐나갈 것으로 기대해본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던가?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 아주 원초적인 시작이라면,
이곳에서는 “그가 거기에 있었기에 만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학식이 높던지 낮던지, 그의 고향이 서쪽이든지 동쪽이든지, 혹은 그가 재물이 많던지 적든지, 그런 것은 큰 상관이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나, 한인이 드문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한인이라는 그 한가지 만으로도
가깝게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곳에 처음 왔을때가 생각난다.
오자마자 가게를 인수해서 장사에도 손이 익지 않은데,
그때 2살이었던 막내 엉덩이에 큰 뾰루지가 났었다.
작아지지 않고 계속 부풀어올라서, 남편은 응급실에 갔다온다고 갔는데,
그 길로 바로 입원까지 해야했다.
그때 담당했던 의사가 한인의사가 이곳에 있다며,
그를 불러주고, 그 한인의가 우리 아이를 맡아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그 병실에 꽃을 들고 찾아와준 이도 그 의사의 부인,
남편이 집에도 못가고 아이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자,
그곳에서 가게하던 부부는 음식까지 담아와서 남편에게
주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낯선 땅에 와서 한인의 도움을 그렇게 받으니,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때 사귄 사람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다. (그 중 한집과는 요즘 뭔가 안풀리고 있긴 하지만..)
또한 이곳에 일가친척 없이 이민온 나의 서클 선배가족은
그들의 푸근한 인심과 넉넉한 마음씀으로 우리가족(이때는 엄마를 포함한 대가족의 개념이다)과는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요즘 자주 못보니, 안부가 항상 궁금해진다.
이건 또 다른 이야기,
토론토에서 사귄 친구들이 있다. 한창 친해질 즈음, 이곳으로 날라온 우리.
한번씩 나 사는 데를 방문한 친구들은,
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다시 온다는 이들이 없다.
토론토에서 한 3시간.
우리는 자주 오가는 거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에 싫증이 날때쯤되어야,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게 된다.
내 대접이 별볼일없던지, 아니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의 분석으로는 바쁜 이민생활에 한 이틀을 소비해야
하는 장거리 여행이 되는 이 길이 그렇게 오기가 쉽지는 않은가보다.
이렇게 사람이 귀하고 보니, 어쩌다 길을 잘못들어
우리 가게를 찾아들어오는 사람들에게까지,
주책없이 밥먹어라, 자고자라 라는 소리까지 나오려고 한다.
작년 여름에 낚시차 온길에 물건을 사러왔다가 만난 한인가족은,
그 담에 다시 방문해서, 우리가 태극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했던 것을 기억해내곤,
태극기를 정성껏 주고 가신 분도 있다.
그런데, <다시 안오는> 징크스를 깬 분들이 있다.
지난 주말, 토론토의 형부와 함께 왔던 이들이 그분들이다.
나 살던 고향에서 이곳에 이민온지 이제 1달된 신참분들.
캐나다 시골을 한번 보러 아이들 학교간 사이 오셨었다.
그분들은 객지인 서산의 한 마을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군 이들이었다.
한국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우리 사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그렇게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당연하게 “다음에는 아이들 데리고 한번 다시 오세요”했다.
아이들도 우리집과 꼭 같이 세딸들.
그런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목요일 저녁 연락이 왔다.
금요일
피디 데이는 두어달에 한번 있는 학교휴일로 프로페셔날 디벨로프먼트의 약자이다.
선생들이 자기 계발을 위한 세미나를 갖는등, 일반 정규수업외,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하는 날이다.
물론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시라”고 했다.
철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서 이민온 분들을 만나는 건 참, 마음에 뿌듯함을 준다.
캐나다살이의 선배라고, 나와 남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우리는 <깊은 소견>은 없지만, 그래도 체험에서 얻어진 지식을 총동원해,
그들에게 필요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주려고 한다.
한국에서도 시골에 살아서, 토론토 생활이 많이 힘들어보인다.
백인위주의 정돈된 선진국을 상상하고 왔다가,
각색 인종, 혹은 살벌하기도 한 도시 분위기에 잔뜩 놀란 표정이다.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던 아이들이 수업때문에 고충당하는 모습 보기에도 안스러운 것 같고.
한국말 쓰는 아이들과 영어 쓰는 우리 아이들이 그런대로 서로 낄낄거리며 잘 논다.
그런 아이들을 뒤에 남겨놓고 어른끼리 지역 타워에 나섰다.
한 마을에 가서는 가게 수리중인 한인을 만나 같이 이야기하고.
비지니스 감각이 뛰어난 분이었다.
판단력, 분석력이 빠르고.
이제 시간이 조금 지나서 영어환경에 익숙해지면,
이민을 살아내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시 방문해준 저력>이 그들을 다시금 우러러보게 한다.
늦은 나이에 새출발이지만, 그 힘으로 모든 것을 잘 헤쳐나갈 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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