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이의 조언
우리 동네 최고의 이슈가 되는 <학교 재검토>에 관한
주민들의 모임이 엊저녁에 있었다.
눈 때문에 2주간이나 모임이 연기됐는데도,
많은 학부모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세아이의 엄마인 샌드라가 의장을 맡고,
그동안의 경과보고를 했는데, 설문조사, 교육청에 보내는 주민들의 편지,
앞으로 싸워나갈 역군들을 소개시켜주는 자리도 있었다.
우리학교가 검토대상이 된 것은 지난번 칼럼(20호)에서도
언급했던 바처럼 학생수의 경감(280명 정원에 200명 인원),
건물의 노후화(35년)등이었다.
학생수가 정원의 80%이상(225명)이면 검토대상에서 제외되는데,
25명의 학생수가 부족한 것이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털고일어나, 결성된 위원회에는
<교통 분과…버스타고 다니는 아이들에 관한 연구>
<건물 분과…보수공사가 필요한 부분, 건물의 현재상태등 점검>
<마을 분과…학교폐교가 마을에 미치는 영향 연구>
<재정 분과…학교후원금 모금, 관리>
등으로 나뉘어서 편성이 되어있었다.
마을분과에서는 학교가 폐교될 경우 집값하락과,
경기에 미치는 영향들을 연구할 것이고,
교통분과에서는 아이들이 다른 마을의 학교로 통학할 경우, 걸리게 되는 시간,
소모되는 버스운행비등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번 사안의 막중한 때문에 끼어들었지만,
교육청과 학교, 그리고 학부모들의 움직임이 어떨지 지켜보는 흥미가 있다.
이사람들이 중요현안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본다고나 할까.
막연하게 어떻게 싸워나가야 했던 것에
대한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날의 하일라이트는 옆마을에 사는
<존>의 보조발언이었다.
그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작년에 폐교당했다. 그는 그 학교의 학부모위원회의 한사람으로
<학교폐교>를 막기 위해 여러모로 애쓴 사람이다.
<사슴농장>을 한다고 자기를 소개한 그는 제 모교이면서
자신의 두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가 폐교되었다며,
* 주민들아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후원해라.
* 교육위원(폐교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들을 괴롭혀라.
* 감정개입은 효과가 없으며,
사실에 입각해서 학교가 생존해야할
이유를 증명해내야 한다.
* 의자 뒤에 깊숙이 앉아있다가는
여러분의 학교도 폐교당할 수 있다.
그는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이 뛰어오를 정도로 혈기팔팔해야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지시킨다.
교육청에서 주장하는 것 중의 하나는
경비절감과 교육의 질에 관한 부분으로,
소수의 학생들로는 성과있는 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학교의 통폐합은 아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것.
그러나 <존>은 250여명 규모의 학교에서
700명 규모의 학교로 옮겨갔으나(자신의 아이들)
학교 과외행사에서 아이들이 기회를 차지하기 힘들고,
소속감, 학생간, 학생 교사간, 교사 학부모간의
관계가 엉성해진다고 지적한다.
이 말에 덧붙여 은퇴한 교장이 보조발언을 했는데,
그는 자신은 학생수 42명인 학교도,
학생수 1천명에 가까운 학교에서도 근무했었는데,
<교육의 질>로 생각할때
적은수의 학교가 훨씬 나았다고 지적해준다.
<적은 숫자>에 대한 내 믿음이 더 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모임의 끝부분에는 자유 질문, 의견제시등의 시간이 있었다.
많은 참석자들이 <존>에게 질문을 던진다.
옮겨간 학교에서의 아이들 생활, 부모의 입장,
어떻게 효과적으로 싸워나가야 하는 것인가를.
존은 자신의 침이 마르고 닳도록,
스스로를 가르켜 <자신은 정보덩어리>라며,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것 위에 있는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며.
사실 이날 방어에 성공한 학교의 학부모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날씨 관계로 오지 못했다.
나도 그렇지만 참석자 모두 <존>에게서 보다 큰 힘을 얻는것처럼 보였다.
<성공>자의 이야기에 연연해하지 않을 만큼.
나는 <존>을 보며 생각한다.
실패한 자의 조언의 명료함과 적확함을. 그리고 안타까움을.
그러면서 생각에 꼬리를 잇는다.
그러니까, 80년대 초반 대학생활할때,
교지편집에 관여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학도호군단이란 것이 있었는데,
전두환정권시절 총학생회를 없애는 대신,
그를 대신해 학생회를 그렇게 재단한 것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호국단은
어용단체라는 비판이 있었던 걸로 알고있다.
그전에는 교지편집은 독자적으로 편집위원회가 결성되어,
그안에서 재량껏 했으나,
그해만은 호국단 산하에 그들에게 재정지원을 받으며
그렇게 교지를 만들어야 했던 것.
전해에도 일했던지라 별 망설임없이
편집위원의 한사람으로 들어갔다가,
편집장을 맡았던 남학생이 무슨 사정인가로 그만두고,
그 책을 내손으로 마감했다.
그때,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 둔한 감각으로도 호국단이란 단체가,
마치 오염된 사회가 캠퍼스로 옮겨온듯,
그들의 씀씀이와
행동양식에서 대단히 나쁜 냄새가 냈다.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부분은 책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인가를 어떤 <춤추는 곳>에서 했다.
샹델리아의 불빛이 마구 돌아가는 곳, 학생신분인 주제에 비싼 안주와 비싼 술을 시켜놓고,,,
그때, 주빈이면서 곁다리처럼 느껴졌던 이상한 기분들…
그렇지만 책에 관한 부분은 그렇게 많은
제재를 받지 않았다.
다만 책의 서두에 요란하게 인사말이 많이(호국연대장, 문화부장 등등..)
들어갔던 것을 빼고는..
그해를 마지막으로 호국단이 폐지되고 다시 총학생회가 복귀했다.
호국단의 그늘에서 1년을 보낸 나에게는
교지부분에 관해 할말이 많았다.
대학4학년이던 그때,
<민주>인사이면서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이가 나를 불렀다.
<교지>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그래서 대학노토 용지로 4매 가까이 되는 글을 써서
그에게 주었던 기억이 있다.
<교지>만은 독립된 기관으로,
위원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글을 모으고,
편집하고 해야한다는 요지였으리라.
인터넷을 통해 모교의 <교지편집>을 거친 이들이
서로 교류를 갖고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호국단 이전의 <교지>는 모두 방기하고 호국단 이후에 탄생된 교지는
이름까지 바꿔서 <자기들만의 순수>를
이야기하며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다 늙어서 후배들과 교지를 끈으로
다시 연결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호국단>이후의 새 교지탄생에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저 어용단체의 하수인으로
후배들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책을 만든자가 되어있지는 않은지
썰렁한 느낌이다.
실패한 사람만큼, 그 방면에 해박한 사람은 없다.
그 실패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 그들이 성공을 만들 수 있고,
그런 <실패>를 나누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