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달린다.
나지막한 집들이, 옷을 벗은 나무 사이로 더 확실한 선을 그리며 서 있다.
주로 평지인 이곳엔 차들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밖의 풍경에 눈이 많이 간다.
몇년전부터, 꽤나 자연친화적이 되어있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는데,
지난번 운전도중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다른 것을 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차를 달리면서 볼수 있는 것이 그저 바깥온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들, 능선들, 그리고 가축들 먹이로 말아놓은 건초더미들이다.
때로는 그 풍경들이 무척 정겹다.
자연에 적응해서 스스로를 바꿔나가는 그 모습밖에는,
어떤 흥분도 뽐냄도 그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길에 아미쉬들이 세운 학교가 있다.
학교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작은 집 한채인데,
운동장에는 축구골대같은 것이 한개 세워져있다.
두개도 아니고, 오직 한개...
언젠가 그 길위를 달리는데, 아이들이 공차기 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긴 옷을 휘날리며 아이들이 공을 쫓아 몰려다닌다.
제 부모들이 바느질해서 만들어줬음직한 투박한 모양의 옷을 입고
여자아이들도 열심히 발길질을 한다.
한 이십여명 될까?
어느날은 긴 마차에 한꺼번에 올라타느라 바쁘다. 옛스런 아이들.
사진에 꼭 담아놓고 싶은 모습이었다.
이러다 보니, 사진찍기와 마음에 담아두기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사진에 관심을 두기 전에는 그저,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이젠, 그렇지 않다.
특별히 아미쉬들은 나에게 좋은 표적?이 된다.
우리가 교회가는 시간, 차를 타고 쌩쌩달리다 보면,
아미쉬들의 예배시간과 맞아떨어지는지,
마차들의 행렬을 볼 수 있다.
검은옷으로 단장한 아미쉬 가족들은 까만옷과 까만 모자를 쓴 인형같은 아이들을
뒤에 태우고 길을 재촉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대여섯대의 마차가 행렬로 늘어선 것을 보았는데,
거의 미칠 뻔 하였다.
정오의 햇살을 받고 있는 일단의 마차행렬을 사진에 담고싶어서.
그들은 그들의 길이 바쁘고, 우리는 우리의 길이 바쁘다.
또한 가던길 멈춰서서 그들에 대고, 셔터를 눌러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 부닺치면 차에 있는 세 사람의 반응이 나타난다.
<언니: 가서 말하고 허락받고 찍으면 어떻겠니?>
<남편: 빨리 찍어. 그리고 후다닥 가면 되니까.>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달리는 차안에서 차창을 통해 찍는다면 좋은 사진
나올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가는 사람들에게 달려나가서 사진좀 찍을 수 없겠냐고
변죽을 올릴 수도 없다.
사진기만 꺼내들고, 안타까와하다가 어느새 그 순간이 지나가고 만다.
뒷통수만 건질 때도 있다.
(이것도 조심스럽다. 달리는 차안에서
멀리서 찍은 것이라 상태가 좋지않다)
우리들이 타는 차가 여러종류인 것처럼 마차도 그 생김새가 여러가지인 듯하다.
비를 가릴 수 있는 덮개가 있는 마차부터,
그저 올라타기에 간편한 것까지..
이런 모든 것들을 상세히 알기위해선
아미쉬 가족과 기필코 친구가 되어야 할텐데....ㅎㅎ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다는게, 참으로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떤 계기가 있지 않는한, 사람을 찍는건 당분간 어려울 게다.
그러니, 이런저런 이유들에 묻혀 있는 나같은 사람을 보건데,
사진작가이든 어떤 종류의 예술가이든 얼마나
용맹스러워야 할까?
스스로의 직업에 확신과 열정으로 덤벼들지 않고,
이런 아마츄어 정신으로는 되는 일이 한가지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왜 이런 마음이 들게 됐는가?
그저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가장 좋은 <도구>일 것 같은 사진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사진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가?
그렇진 않다.
그들이 내 글을 읽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다.
사진을 찍으면 초상권 침해라고 할만도 한데, 글은 이렇게 자유스럽다니...
그래서 글이 더 많은 <문제>를 내포하는지도 모를일...
오늘은 하늘이 낮다.
잿빛이다.
오랜만에 주제없이 자판을 두드려본다.
현실과 열정 사이, 정도를 부제목으로 달 수 있을까?
사진을 현상해서 실물을 반듯이 확인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조급한 우리시대 사람들의 습관일지 모른다.
마음의 사진을 찍어
은은한 그리움으로 간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