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뭐냐고, 불만을 토했던 게 며칠전이다.
그럴만도 한게,
며칠전 토론토를 들렀다, 도서대여점에서 3권의 책을 가져왔고,
그중 읽은 2권에 대한 미흡한 마음이 그렇게 막말을 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다는 작가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가 그중 하나고,
"개미"로 유명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소설 모음집인 "나무"가 또 한권이었다.
사실, 이 2권에 대해서 길게 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둘다 나쁜 작품은 아니지만, 굳이 재론하고 싶지 않은 그런 뒷끝을 남겼다.
그러나, 조금 더 예의바른 사람이 되어야겠기에,
왜 시덥잖아하는지, 약간 설명해보자.
"눈의 여행자"의 주인공은 작가이다. 출판사의 독촉에 시달리는... 선불받은 원고료 때문에 쫓겨사는 그가, 그 여파로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눈의 자취를 따라, 사라진 아이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아! 아니다. 줄거리 요약이 제대로 된 것 같지 않다. 어쨋든 책의 주인공처럼 불투명한 작품이다. 복선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는 베르베르가 유명할 때부터 그의 작품을 한번도 읽지 않았다. 외국 작가의 작품은 고전을 빼고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어찌됐던 나하고 인연이 먼 작가인 것 같다.
이 작품집의 서문에서 작가는 말한다.
긴 글(장편)을 쓸때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저녁에 1시간을 할애해서 짧은 글을 쓰는데, 이 작업은 정신적인 휴식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장편 구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정말로 아주 짧막짧막한 글들이다.
그런데, 세상에. 1시간에 쓴 글들이라니.... 고얀히 심통이 난다. 정성없는 글이 아닌가? 그의 기발한 발상과 이야기전개는 사줄만 하나, 어째 작가가 읽고있는 독자들을 비웃고 있는 것같은 착각이 든다. 쓰레기처럼 버린 이야기들을 맛있게 먹고있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는, 비뚤어진 나의 책 감상도 못말리는 것이지만, 다시는 그의 현학적이고, 머리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에 빠져들고 싶지 않다.
그런데, 마지막에 남겨놓았던 작품, "희망의 이유"는 이런 나의 쓰잘데 없는 편견을 싹쓸어버리고, 한낱 종이로 만든 책을 존경의 눈빛으로 지긋이 내려다 보게 한다.
그래, 오늘은 이 책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Reason for Hope"라는 원제가 있는 동물행동연구가인 제인 구달의 글이다.
책 표지에 보면, 챔팬지와 함께 있는 제인의 희미한 사진과 영어표제밑에 "평생을 침팬지와 함께한 제인 구달의 영혼의 메시지"라고 되어있다.
그렇다. 이책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1시간에 쓴 글도, 몇날 여행한 자료를 가지고, 한권의 책을 엮어낸 것도 아닌, 평생에 걸쳐 살아온 날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침팬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가 살아온 날들에 비춰서, 인간들에게 전하는 메세지이다.
외국에 나와살다 보니, "문화"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내 문화, 네 문화, 우리 문화,,,
서로 낯설게 느껴질때 우리는 "문화차이"라고 말하게 되곤 한다.
제인은 침팬지 사회를 연구하면서, 처음엔 그들 사회에 인간같은 정과, 도구사용과, 질서등을 발견한다. 그러다가, 한 그룹의 침팬지로부터 한 그룹이 분화해나가서, 다른 영역을 형성하고, 그룹간에 전쟁이 있게 됨을 알아챈다. 친하게 지내던 동물끼리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는. 그는 이에서 "정신의 문화적 감옥"을 찾아낸다. 인간사회까지 해석할 수 있는.
말하자면, 내 문화안에 있는 이들에겐 최대한 관용을 베풀면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슴에 작은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문화적 감옥이구나,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예쁘게 포장된 민족주의니, 국가주의니 등이 감옥이 될 수가 있겠구나.
그녀의 글을 인용해보자.
"문화적 종분화가 명백히 인간의 도덕적 영적 성장을 방해해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고의 자유를 가로막고, 생각을 제한하고, 우리를 우리가 태어난 문화안에 가둬놓았다. (중략) 문화적 종분화는 분명히 세계평화의 장벽이다."
나찌의 작혹함, 이스라엘, 르완다, 팔레스타인 등에서 나타난 민족적, 종교적 분쟁들의 원인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동물보다 더 폭악해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지만, 사랑과 연민과 자기 희생으로 영웅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점을 알고있다는 것이다.
제인으로의 여행은 흥미롭기만 하다. "분노위에 태양이 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할머니, 그녀는 집안을 곧추세웠으며, 아프리카까지 따라가서 텐트속에서 딸을 돌보며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그녀의 진정한 동역자 그의 어머니등, 정신적인 자양이 그전부터 충분히 공급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놀랜 부분은, 그렇게 다듬어진 제인이었는데, 그의 두번째 남편인 데렉이 암에 걸려 죽어갈때, 우리가 주위에서 보는 이성잃은 환자가족과 아주 흡사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떤 미신일지라도, 어떤 대체요법일지라도 매달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옆에 있어야 했던, 그 불행했던 시절, 그리고 죽음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겪게 된다.
남편이 죽고, 그녀가 평정을 찾은 것은 자연을 관조하면서 였다. 아마도 아프리카, 침팬지를 연구하던 곳인 숲속에서 였으리라.
"그날 오후 보이지않는 손이 내 앞의 커튼을 치워, 아주 잠시 동안 그런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했던 것 같다. 아주 잠깐 '밖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영원하고, 고요한 환희를 알게 되었고, 주류과학은 단지 그 작은 일부분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진화를 믿는 과학자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신을 믿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해 몇번 나온다.
대부분의 과학자가 신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며, 제인 나름대로 천지창조와 성경의 기록에 대한 해석이 있다. 그녀는 우화와 상징일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사실, 그녀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는지 큰 관심이 없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그녀의 책을 거론하고 싶진 않다.
이야기를 돌려서,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제인에게 어떤 여자가 와서, 시비를 건다.
나의 딸은 동물이 전해준 장기가 없었으면, 죽었을 목숨이었다.
어떻게 사람보다 동물이 중요하냐?라고.
제인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딸을 살려준 그 동물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 마음으로 동물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위주의 사고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발상을 곳곳에서 본다.
동물도 감정이 있고,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너무 얕보고 간과한다는 것인데.
요즘엔 아이들이 키우는 작은 동물들을 다른 눈으로 본다.
그들에게도 싫고, 좋고, 행복하고, 어렵고 한 모든 것들이 있음을 본다.
공존하는 것, 그것만이 살길인 것 같다.
동물연구를 통해서, 이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환경운동가로, 강연자로 숨쉴틈없이 지내는 제인이, 지난번 잠시 한국텔레비전에 나와서 인터뷰하던 광경이 눈에 잡힌다.
"여러분은 누구나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희망을 갖는 이유를 네가지로 이야기했다.
인간의 두뇌
자연의 회복력
전세계 젊은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
불굴의 인간정신
이 그것이다.
결국 그녀의 메세지는 우리들 각자가 중요하고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있으며 각자가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프리카의 기아는 못 돌봐도, 내 동네에 거지는 챙겨줄 수 있으며,
물이 부족한 지구를 생각해서, 양치질할때 물을 처음부터 틀어놓지 말것등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다. 그저 알면서도 안하고 있을뿐이다. 그런 일은 그런 일을 전담할 사람에게 맡겨놓으면서.
'영화와 책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시작한 사랑이야기 (0) | 2004.05.26 |
---|---|
Where is Spirit Lives? (0) | 2004.02.22 |
스크린 감상기 (0) | 2003.12.24 |
한국 텔레비전을 보면서 (0) | 2003.10.04 |
휴 캐나다>!! (0) | 2003.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