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도착한 첫날, 몇시간이 지나니 오빠의 아들이 머물고 있던 방에서 뚱땅거리는 소리가 난다.
무슨 일인가 하여 갔더니, 반쯤 떨어졌던 문짝을 두드려 고치는 중이었다. 망치소리가 우리집에서 처음으로 난 날이다.
"이사하지 말고 기다려!"
오빠는 한국에서 오기전에 이런 메일을 내게 보냈다.
금같이 귀한 여행길에 이사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고마울데가,,,, 하는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먼데서 온 사람을 그렇게 부려먹으면 안된다고 난리다. 그래서, 인사겸 말씀은 고맙지만, 이곳서 잘할 수 있으니 걱정마시고 오시라고 적어보냈다.
다음에 온 답장도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피아노 옮길 기구 가져올께. 같이 나르자."
큰 가구가 없는 이사고 가까운 곳이어서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오빠가 도착, 두 아들과 우리 가족과 이삿짐을 날랐다. 그는 그야말로 전문가 수준이어서, 그 큰일을 잘 치뤄냈다.
페이슬리에서부터 마일드메이의 새집까지 30분 되는 거리를 한번 같이 다녀보곤, 핸들을 바로 인계받아 운전을 한다. 그것도 차 뒤에 트레일러(짐차)를 달고 말이다.
처음에는 누군가 옆자리에 타야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1시간 30분 거리의 동생집까지, 2시간 30분 거리의 토론토까지 혼자 다닐 정도가 되었다.
오빠가 오면서 집안에 활기가 생긴다.
새집에서의 일이다. 소나무의 밑자락 가지를 잘라주지 않아서 나무가 길을 막고 있고, 보기에 흉하다. 남편은 가지가 굵어서 그냥 자를수 없다며 전기톱을 빌려다 잘라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어느날 아침, 식사를 하는데 오빠와 친정엄마의 얼굴에서 땀이 번들거린다. 엄마 왜그래?
엄마는 내 손을 이끌고 밖으로 무작정 나가신다. 소나무 밑에 잘려진 가지들이 가지런히 있다. 오빠가 자르고 엄마가 도와줘서 아침나절에 일을 끝냈다는 것이다. 여러 그루의 뚱뚱한 가지들을 일반톱으로 자르다니, 오빠가 마치 괴력을 지닌 사람처럼 보인다.
페인트에 대해서도 말해야 겠다.
우리집의 베란다 색이 밤색이었다. 그렇잖아도 모텔같아 보이는데, 그 베란다색 때문에 더욱 그래보인다. 전체 집의 색깔인 흰색으로 바꾸면 괜찮으려나? 그 일을 오빠가 했다. 얇은 쇠창살이고 밑색이 어두우니, 흰색이 그저 곱게 먹어들어가지 않아 혼났다고 나중에 말해준다.
이런 일은 이외에도 무진 많다. 토론토의 노인아파트에 사는 엄마의 집 페인트를 오빠가족이 동생과 함께 칠했다. 엄마는 페인트 칠한 게 아까와서 죽지도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동생집의 차고도 흰색으로 칠했고, 신발장을 만들어 짜넣어주었다고 한다.
7월초에 와서 오빠가 한 일은 정말 글로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어떻게 그런 일을 방문자에게 맡겼냐고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따지고 들 것같아 내가 조심스러운데, 사실, 그 모든 일을 오빠가 다 찾아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낙 하루하루의 삶에 바쁘고, 또 일부러 사람을 불러서 시키지 않는한 스스로 하는 재주가 부족한 우리들은 오빠의 그런 도와줌은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서 외경심까지 생긴다.
오빠의 손재주는 이모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모부는 목수였는데, 요즘 시대였다면 떵떵거리고 사실 정도로 많은 집을 지으셨다 한다. 깡촌의 첫 2층집이었던 우리집도 이모부의 손으로 지었고, 현재 오빠가 살고있는 집도 이모부의 작품인데, 오빠가 손을 봐서 살고있다고 들었다.
엄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저 막걸리 몇잔이면 만사 오케이였으며, 일값을 받았던 어떤 날은 막걸리를 마시고 어디다 잊어버렸는지, 오락가락하더라는 말도 전했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이모부는 "술에 취했을 때가 더 많았던 것"같아 보이니, 일은 하셨지만 실속은 없으셨던가 보다.
엄마는 이모부를 회고하기를 "그렇게 일잘하고, 돈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셨다.
오빠의 배움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다.
"그 일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요?"
결국 나는 그 아픈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
내가 사촌오빠에 대해서 글을 써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 일을 풀어내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고학력자가 무수히 배출되는 사회에서, 남들보다 떨어지는 그의 배움의 배경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르겠기에 말이다.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끝내면서, 그런 일이 상처가 될 나이는 지났지요? 우리? 하면서 짚고 넘어간다.
오빠는 이제는 "상처"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배우지 않은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누구나 잘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고, 그를 서로 인정하고 배우면 된다고 생각한댄다.
2년전 한국에 갔을때, 나는 눈부시게 성장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풍문으로 그가 고교를 진학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던 나는 그런 그가 마치 오랫동안 고치에 갇혀있던 호랑나비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잘것 없어 보였지만, 나중에는 빛을 내서 하늘을 가르는..
"그때 고등학교에서 장학금 제의도 왔었어. 정말 가고싶었지. 그런데, 내 동생도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를 기다리면서 초등학교 1년을 더 다녔었어. 중학생을 2명 키울 수 없었던 것이지. 돈이란 게 한푼이 있었나? 일한 값도 모두 계란 몇개, 쌀 몇 포대 이렇게 들어올 때였는데."
어렸을때 이모네 집에 가면, 우리는 공주 대접을 받았었다. 이모가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깔아주고, 사촌들과 어울려 놀게 하면서 고구마도 쪄주고, 아침이면 대접에 솥에 쪄낸 계란을 먹음직스럽게 상에 올려주시곤 했었다.
그렇게 돈이 없었다니..
내 어린 눈에 그림도 잘 그리고, 멋있게 생겼던 오빠는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누나가 있던 인천에 가게 된다.
오빠의 라이프 스토리를 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 그만큼 잘 알지도 못한다.
공장에서도 일했고, 택시운전을 하였다는 것, 그곳에서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노동자들의 권리찾기에 나섰다는 것, 그때 연설도 하고, 법조문도 외우고, 강의도 들으면서 세상 학식에 눈을 뜨게 됐다는 것, 그후에 했던 중고차 판매는 택시운전과는 유도 아니게 돈벌이가 좋았다는 것, 확장일로에서 차 판매 사업이 주춤하면서 정리하고,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 들었다는 것, 그곳에서는 더욱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것 또한 지금은 일단 발목에 고리가 채워진 상태라는 것들이다.
오빠는 사업쪽에서도 그렇겠지만, 온 몸으로 모든 일을 해나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주변에 친구가 많은 것도 그런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들의 필요를 현실적으로 풀어주는 "좋은 의미"의 해결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재 고향의 친목단체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올해는 대산 지역의 전 친목단체가 모이는 대연합모임의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했다는 말도 들었다.
우리 솔직히 말하자.
그래, 고학력자라는 우리들은 고등교육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그렇다. 엘리트 의식을 배웠다. 진정한 엘리트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나는 엘리트라는 그런 의식 말이다. 부끄럽다. 나는 남들이 말하는 1류도 2류도 안되는 대학을 나와서 그럴까?
모두들 언제 많이들 배우는가? 내 경우에는 삶을 살면서, 경험으로 배운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충족하면서 배웠다.
그런식으로 생각해보면, 그처럼 부지런한 오빠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밤낮이 완전히 바뀌는 캐나다에 와서도 낮잠한번 자지 않는 사람..
아침밥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침찌개를 만들어먹는 사람..
그림만 보고도(영어를 읽지 못하므로..ㅎㅎ), 기계사용을 완전히 해독하는 사람..
말안통하는 가게에 가서 잘못산 제품을 제대로 된 제품으로 바꿔오는 사람..
외국인이 무슨 말 하는지 눈치로 80%는 알아채는 사람..
골프가 프로급이라는 걸 밝힐까 말까...
오빠에게 큰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이사나온 페이슬리집은 손볼데가 한두군데가 아니다. 남편은 오랫동안 이 일을 생각해왔다. 기회가 되면 고치겠다고. 그 일을 오빠에게 맡겼다. 전문가가 아닌데, 그는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자재상에 가서 필요한 공구를 샀다. 남편은 그날 와서 말하기를 대패를 사야하는데, 외국어로 그 이름을 알지못해 설명하느라 애썼는데, 오빠가 찾아냈다는 것이다. 정, 끌 등등, 집 수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오빠와 함께 고르고 다녔던 그 일이 남편에게 신기했던 것 같다.
어쨋든 페이슬리 집을 2주간 고치는데, 나는 일이 있을때를 빼고는 오빠를 쫓아다녔다. "시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숙련되지 않은 이 "시다"는 일하다가 입속이 완전히 부르터 버렸는데, 오빠는 나의 배 이상을 일했다. 정말 묵묵히 꼼꼼히. 일하다가 위경련이 일어나서 우리를 혼비백산하게 하긴 했지만.
대패질하는 오빠. 문을 갈려다 벽을 헐어내야 하는 큰 공사로 발전.. 애 쓰셨어요.
지금 페이슬리도 변신했다. 세를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적당한 댓가를 지불했다. ^^)
오빠가 와있는 2달 동안 이런 일들이 벌어졌었다. 그가 일한 것만이 다는 아니고, 간간히 놀러 다녔다는 이야긴 내가 앞글에서 썼다. 그러니, 어찌 그렇게 야박하게 일만 시켰느냐고 묻지 말기를. 오빠는 스스로 그렇게 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 그것은 일반 정규학교에서 돈주고도 살수 없는 삶의 자격증인 것을 나는 오빠를 보면서 느낀다.
오빠에게 주는 사진선물 1 : 이쁜 유니와의 한때.
선물 2 : 종화언니가 "비싼 돈"들여 구입했던 야외음악회,,, 즐거웠지요?
선물 3 : 오웬사운드가 좋았다고 했지요? 그날 정말 날씨 좋았어요, 그쵸?
선물 4 : 선물이라고 쓰다보니, 좀 낯 간지럽네요.
그래도 내가 찍은 사진중에서 오빠에 관한 글밑에 들어간 사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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