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0여년전만 해도 캐나다땅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는 방법은 그 길이 묘연했다. 중국인과 한인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한의원은 있었지만, 그들의 학업배경은 한국이었다.
그러나 현재, 크고 작은 한의 대학에서 수학하는 늦깍이 한의학도들이 많이 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이 일에 적극 매달려 그 길을 닦은 개척자가 있기 마련이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한의사 석영창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88년, 그래 한국에서 올림픽이 있던 해였어. 똑똑히 기억하고 말고. 신문에 광고가 실린 거야. 토론토에 중의대학이 최초로 문을 연다는 내용이었지."
그는 다른 한인들처럼 편의점을 오랫동안 경영해왔다. 그러면서 이대로 주저앉기는 싫다는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할까 심사숙고중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47세.
당시 한국을 방문중이던 부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 부인이 와야 가게 일을 맡기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9월 초 이미 학교는 개학했지만, 그가 처음 학교에 간 날은 3주가 지난 다음이었다. 따라잡기 힘들 것이라고, 다음 기회에 등록하라는 교수들에게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다. 열심히 하겠다면서.
학교 설립자 주(Chu) 박사(중국인 한의사)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동안 가르친 내용을 모두 복사해주면서, 그를 격려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중간고사를 보았는데, 그는 100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한다. 그때 같이 공부한 사람들은 대부분 서양의사와 간호사등이었는데, 한 화학박사를 만났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화학박사는 감자스낵을 만들때 감자의 수분이 46%가 되는 시점에서 튀겨야 가장 고소하고 맛있는 감자튀김이 된다는 것을 밝혀낸 그 업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 하였다.
15명 등록학생 중에서 겨우 7명이 토론토 중의학 대학(Toronto Institute of Chinese Medicine and Acupuncture) 1기 졸업생이 된다.
그는 사실 어려서부터 공부벌레였다. 그 옛날 대학생 한명 배출해도 동네경사가 되는 전북 부안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전북대학교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한 수재였다.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 캐나다로 유학을 와서 캐나다 윈저대학에서 수학 석사학위(Master of Science Degree)를 땄고, 매니토바 대학과 사스카츈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그런 그가 학계에 남지 못하고 생업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은 이민의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이민지에서 능력과 학업을 살린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다는 점 말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풍부함이 그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지나온 시간들을 훑어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그는 중의학대학을 다니면서 한의학과 같은 계열로 보이는 지압학교를 덤으로 마쳤지만, 개업할 자신감은 없었다. 어떻게 학업을 이어가야 하나 고심하던 그는, 중국 인민공화국 보건부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으로 최근에 한의학 공부를 했는데, 더 배워보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는 학교를 추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내고 무작정 기다렸는데 1달 반 만에 답장을 받게 된다.
그 답장에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오는 배움터가 있다. 그곳에 연락해서 등록서류를 당신께 보내라고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건부 장관이 추천해준 학교는 북경에 있는 중의연구원(China Academy of Tradition Chinese Medicine)인데 이 학교가 생기게 된 연유가 흥미롭다.
1972년 전 미국 닉슨대통령의 중국순방길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수행기자단의 한명이었던 뉴욕 타임즈의 Reston 기자가 급성맹장염에 걸리게 된다. 이 기자는 중국의 한방병원에서 침술마취를 통하여 맹장수술을 성공리에 받게 된다.
레스톤 기자는 그후에 "I have seen the past, it works"라는 타이틀로 기고를 하게 되는데 이 글이 서방세계를 흔든다. 말하자면 중국의 고전적 의학치료가 자신을 살렸다는 경탄을 실은 글이다. 침이 서방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같은 이야기를 석 한의사와의 대화에서 얻어듣게 되었다.
중국정부는 그후로 침술공부를 원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중의연구원을 세웠으며 그때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연구원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석 한의사는 이 중의연구원을 가기 위해서 캐나다의 중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그당시 토론토에 살던 그가 대사관이 있던 오타와를 향해 7시간 차를 타고 갔는데 도착한 대사관에서는 시간이 지나서 비자를 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그가 사정하자 중국관리는 40달러를 내면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1달 체류 비자를 받게 된다. 그는 오타와까지 가지 않았더라도 토론토영사관에서도 해주는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모든 일을 혼자 해나가야 했던지라 이런 일들이 발생했었다고 회고했다.
어쨋든 그가 중국에 간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1달 체류비자는 그곳에 살면서 연장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노르웨이, 독일, 미국에서온 서양의사와 한곳에서 기숙했는데 그들과 생활했던 날들을 포함, 3년간의 중국 유학시절을 잠시 소개했다.
한주에 한번씩 빨래를 해야했는데, 중국의 비눗가루가 잘 풀어지지 않아서 욕조에서 세게 발로 밟아야 했던 일, 2시간 정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밖에 널었는데, 처음에는 잘 모르고 널어놓았다가 옷가지들을 모두 도둑맞았던 일, 그 다음부터는 아예 책을 한권 들고 나가 빨래가 마를 때까지 지키며 기다렸다는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 다음에 마른 빨래를 보면 비눗가루가 붙어있어 탈탈 털어내고 입었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은 시장터와 흡사했다고 하는데...
세계 각국의 학생들은 각자의 통역사를 데리고 들어온다. 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이 많으니 중국인 교수가 강의하면 칠판 한쪽에 통역된 영어필기가 채워진다. 그리고 숫자가 작은 일본인, 독일인, 스웨덴, 스페인 사람들은 제나라 통역사를 끼고 한군데 붙어서 교수가 이야기해주는 것을 열심히 통역사를 통해 듣고 메모한다. 그러니 시장통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시끄러울 수밖에.
그들의 수업 방법은 오전에는 병원으로 가서 침을 놓고 오후부터 학교공부를 한다.
병원에 가서 임상실험을 한 것(환자에게 침을 놓는 것)을 숫자로 헤아려보면 1년에 삼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침을 놓았다는 결론에 이른다고.
중국에는 사람이 많으니, 환자도 많고, 풍부한 경험을 쌓을 기회가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의사인 정신롱교수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그의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는 영광도 얻었었다.
또한 한방을 썼던 3명의 서양의사에게서 의학에 관한 여러가지 유익한 정보들을 배우고 나눌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꼽았다.
그가 잊을 수 없는 일은 방학때 연변 백두산 근처의 동포들을 찾아갔던 일이다. 그는 의료혜택이 전무한 그곳에 가서 무료 시술을 해주곤 했는데, 나중에 캐나다로 돌아와야 했을때 그 동네 사람들 100여명이 버스정류장에 나와서 그를 배웅하면서 어렵게 채취한 진짜 자연 벌꿀을 선물로 전해주었는데 그들의 그 마음이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다.
북경에서의 에피소드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매주 일요일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여러 가지 의학 관련 서적들은 거진 500권이 된다. 그는 먼지 쌓여있는 중국책들을 골라서 캐나다로 돌아오기전 배편으로 먼저 부쳤다.
중국유학 후에 토론토에 정착한 그에게 그 500여권의 책은 개인적인 연구의 장을 마련해줬다. 북경한의원을 개원해 환자를 보는 그는 그후에도 차이나타운에 가서 틈만 나면 책을 사들였다. 그는 그 책들을 지난 5-6년간 모두 훑었다.
본인의 임상경험과 중국에서 가져온 원서들, 그리고 그동안 공부로 얻은 서양의학의 지혜들을 모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국책을 읽는 것은 그에게도 쉽지 않다. 어느때는 한 구절에 걸려 하루 종일 부대낀 적도 많다.
그는 온주 한인실업인협회 회보등에 한의학칼럼등을 기고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대학논문 크기의 “한의약 이야기”에는 건강에 관한 알찬 내용이 빼곡이 차있다. 5백여 쪽이나 되는 이 책에 여백의 묘를 살렸다면 2-3권으로 묶여도 손색이 없을 분량이다.
석영창 한의사와 그의 책.
더운 여름날 막일이나, 공부 등 땀나는 일을 하고 나서 찬물에 머리를 감는 것은 어떤 영향을 줄까? 그가 펴낸 "한의약 이야기"에 의하면 피로회복에 좋을 듯 싶은 이 같은 행위가 해롭다고 말한다. 179쪽의 "찬물로 머리감기"라는 짧은 글에 의하면 머리에 물을 끼얹으면 머리와 목주위에 있는 모든 근육이 수축되어 혈관이 가늘어지고, 혈류량이 감소되어 현기증이 생기게 될 수 있고 뇌가 부어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뇌의 신경세포가 흥분되어 정신집중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학습과 작업능률이 저하된다는 것이다.
40대 후반에 시작한 그의 한의학이 이제 꽃피우기 시작하는 것 같다. 허준의 고향인 경남 산청은 석 한의사의 할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도 인연이랄 수 있을까?
못말리는 그의 연구기질로 미루어, 그는 이쯤에서 일을 접을 것 같지 않다. 더 많은 연구, 더 많은 경험들을 쌓아갈 것이다. 그의 바램처럼 삶의 흔적까지를 담아낼 또 다른 저서를 기다리게 되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 캐나다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한의사라고 그를 소개했다.
그렇다. 그가 발을 뗀 이후로 그와 같은 길을 걷는 한의사들이 많이 생겼다. 이들은 현지에 한의학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척박한 이민의 땅에서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길을 닦고 있다. 또한 한의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들도 영세하긴 하나 하나둘씩 문을 열고 학생들을 맞고 있다. 그는 현재 센추럴 한의대(Central College of Oriental Medicine)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방면의 개척자라고 볼 수 있는 그가 앞으로도 한의사로 이곳 사회와 동포들에게 유익함을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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